[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삶의 무게를 지우려는 사람들의 몸부림

국민일보

[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삶의 무게를 지우려는 사람들의 몸부림

탬버린, 김유담 지음, 창비, 344쪽, 1만4000원

입력 2020-05-21 18:49
김유담의 소설집 ‘탬버린’에 실린 동명의 단편소설에는 탬버린을 흔들며 삶의 무게를 지우려는 여고생 ‘송’이 등장한다.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송이 혼신의 힘을 다해 탬버린을 흔들 때면 뭔가를 털어버리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그란 금속들이 부딪치면서 퍼지는 소리가 요란하면서도 처연하게 마음을 울렸다.” 픽사베이

‘커피와 담배’를 읽고 나서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혼자 한번 답해 봤다. 나라면 무엇에 대해 쓸 수 있을까.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다니. 취향 중심 콘텐츠가 성황을 이루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아무튼’ ‘띵’, 그리고 ‘커피와 담배’가 포함된 ‘말들의 흐름’ 시리즈까지, 취향 공동체에 맞춰진 기획물이 대세를 이루는 현상은 출판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에세이 분야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작가의 취향을 키워드로 한 시리즈들이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취향은 ‘사후적’이다. 뜻대로 안 되는 세상에서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계는 달리 말하면 내게도 열려 있는 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덕후’의 세계는 노력을 배반하지 않는다. 시간과 관심을 쏟으면 ‘될’ 수 있고 ‘이룰’ 수 있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 있고 그 간극을 메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에 취향은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이자 내가 나를 키울 수 있는 최대한의 교육이다.

‘커피와 담배’를 읽으며 영화 ‘소공녀’를 떠올렸다. 주인공 미소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3년차 가사도우미다. 미소의 일당은 4만5000원이다. 그 돈을 받으면 미소는 위스키 한 잔을 사 먹는데 1만2000원, 담배 한 갑을 사는 데 2500원, 데이트하는 데 1만원을 쓴다. 나머지는 모아 둔다. 1만원은 월세 낼 돈이고 5000원은 세금 낼 돈이다. 일당의 절반을 취향과 사치에 쓰는 미소에게 담뱃값 인상만큼 가혹한 현실은 없다.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미소는 집을 정리한다. 지낼 곳이 없어진 미소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신세를 진다.

동화 ‘소공녀’의 세라처럼, ‘커피와 담배’의 정은 작가처럼, 미소도 가난하다고 해서 품위를 저버리지 않는다. 미소에게 품위란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며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물론 담배와 위스키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보는 게 좋겠다. 알레고리로서의 담배와 위스키는 예술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으며 안정되지 않은 그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예술이든 사랑이든 안정되지 않은 그 무엇이든, 그것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남들에겐 가장 중요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인 한편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한 절박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커피와 담배’를 읽으면서 영화 ‘소공녀’를 떠올릴 때, 미소의 취향과 함께 미소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을 테다. 그래서였을까. ‘커피와 담배’를 읽으며 김유담의 소설 ‘탬버린’이 떠오른 건. ‘탬버린’은 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신인 작가 김유담이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데뷔작이기도 한데, 섬뜩한 생의 무대에서 도망쳐 산뜻한 취향의 세계로 넘어온 사람들이 간신히 두 세계에 발을 디디며 현실을 견디는 모양이 꼭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한층 더 비극적이고 한층 더 친근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들에는 지방 소도시에서 벗어나 서울로 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인물들, 또는 생의 무게에 짓눌려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로와 절망에 대처하는 놀이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탬버린으로 박자를 쪼개고 온몸을 흔들며 고된 노동의 피로를 날려 버리는 여고생의 모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탬버린에 달린 동그란 금속을 징글(jingle)이라고 한다는 것도 이 소설을 통해 알았다. 금속 방울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가벼운 마찰음은 음악이라기엔 너무 근본 없지만 소리라기엔 너무 깊은 소울을 자아낸다. “나는 그 소리가 좋아. 나만 징글징글하게 사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어때? 너도 들리니?” 들리는 것도 같다. 가벼운 취향과 무거운 인생이 호젓하게, 또는 절박하게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마찰음들이.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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