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의학 칼럼]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국민일보

[성경 의학 칼럼]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하나님이 세운 ‘생로병사’ 기둥생명으로 출발해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 삶의 덧없음·두려움 가져야

입력 2020-05-2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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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눌 말씀은 창세기 4장 26절의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이다.

말씀을 통해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생을 생로병사의 과정으로 보면 이는 마치 네 개의 기둥과 같다. 네 개의 기둥이 인생을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그 기둥 사이에 점처럼 수많은 인생사가 이어진다. 이런 인생사를 통해 우리는 울고 웃는다. 그러면서도 정작 중요한 기둥을 보지 못한 채 점처럼 펼쳐진 인생사만 중요하다고 여긴다.

생로병사라는 기둥은 당장 급해 보이지 않아도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기둥을 잊고 사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급한 일만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늘어가는 흰 머리카락을 보며 늙어가는 자신을 깨닫는다. 그제야 병들어 가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지만, 그때조차 인생을 지탱하는 기둥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기둥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세워둔 운명과도 같다. 생명에서 출발한 기둥은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결국, 맞이할 미래는 죽음이라는 걸 보여준다. 현대인들은 마치 그 결과가 보이지 않는 듯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기둥들 사이의 점만 이어가려 해도 결코 기둥을 벗어날 수는 없다.

요즘 사람들은 라틴어 ‘카르페 디엠’을 즐겨 쓴다. 현실을 즐기라는 의미다. 왜일까. 바로 네 개 기둥에 대해 아는 것 세 가지와 모르는 것 세 가지가 있어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어떻게 죽을지도 우리는 모른다. 끝으로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그래서 허무하다. 생각할수록 공허한 일이다. 현실을 즐기라는 말이 나오고 현대인들이 여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르페 디엠과는 달리 라틴어에는 유명한 말이 또 있다. ‘메멘토 모리’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로마 군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개선문을 통과해 승전보를 알릴 때 노예들에게 메멘토 모리를 외치도록 했다고 한다. 기가 막힌 역설이다. 정작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맛본 사람은 노예들이다. 이들의 입을 통해 죽음을 기억하라는 구호를 외치게 한 것이다. 승리한 자들은 그 말을 듣는다. 왜일까.

당장 승리에 도취해 영원히 살 것처럼 느끼지만 결국 승자도 죽는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노예들을 통해 죽음을 엿보는 것이다.

죽음은 그 자체가 메시지다. 반드시 죽을 것이고 홀로 죽으며 빈손으로 죽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죽음이라는 기둥, 결국 그것이 나를 덮친다는 운명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창세기 4장에는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이 에노스를 낳은 후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기둥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로운 걸 알게 된다. 바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죽음을 의식한 자가 결국 주의 이름을 부른다.

살아있는 오늘이 당연한 것처럼 죽음도 자명한 미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야 한다. 죽음의 얼굴을 보고 삶의 덧없음을 느끼길 권한다. 네 개의 기둥 사이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한다. 오늘 하루, 시간의 기둥 사이에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길 바란다.

이창우 박사(선한목자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