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를 얻었다… 세상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국민일보

섭식장애를 얻었다… 세상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먹토’ 상담 유튜버 이진솔씨

입력 2020-05-23 04:04
“섭식장애는 단순히 거식증이나 폭식증으로 나뉘는 게 아니에요. 음식과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는 걸 말하죠.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마음의 병이랄까요.”

10년 넘게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유튜버 이진솔씨는 지난 17일 “더는 음식이 두렵지 않다”며 ‘회복인’으로서의 삶을 털어놨다. 이씨는 “남몰래 구토를 하면서 체중을 감량하다 보니 스스로가 사기꾼처럼 느껴졌었다”며 “그랬던 내가 유튜브 영상으로 다른 섭식장애인을 도울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섭식장애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는 이진솔(27·사진)씨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급격한 체중의 변화를 겪었다. 극단적으로 마른 적도 있었다.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들어선 ‘먹토(먹고 토한다)’의 길이 이씨를 몸에 대한 집착으로 이끌었다. 스스로를 ‘회복인’이라고 부르게 되기까지 10여년. 지난 17일 경기도 김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그간의 사연을 들었다.

첫 먹토의 기억

이씨가 처음 먹토를 한 건 열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그해 이씨의 가정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중3이었던 이씨는 큰 충격에 빠졌다. 폭력에 대한 공포는 자신의 처지를 향한 분노로 바뀌었다. 가슴이 답답했고, 음식을 소화하지 못했다.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답답증이 극심해진 어느 날 견디다 못해 억지로 구토를 했다. 이씨는 “그 날 가슴 속 응어리가 분출되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씨는 이후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게워냈다. 음식을 쏟아낼 때면 꽉 막혀있던 마음도 뚫리는 것 같았다. 먹토를 반복하면서 51kg였던 체중은 순식간에 44~46㎏이 됐다. 곧 주변의 ‘외모 칭찬’이 시작됐다. “살 빠지니까 보기 좋다” “예쁘다” 실제로는 불행했지만, 주변은 자신을 ‘먹어도 날씬한 애’라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 칭찬이 듣기 좋았고, 집착하게 됐다.

이씨는 시간이 갈수록 ‘먹토 전문가’가 됐다. 앞니와 부딪힌 손등에 상처가 생기자 손가락 대신 칫솔을 사용했다.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먹토가 쉽다는 말을 듣고 물을 쉴 새 없이 마셨다. 그렇게 1년쯤 지나자 고개를 숙이기만 해도 토가 나왔다. 위산에 치아가 부식되고, 손에 마비 증상이 오고, 면역력이 떨어졌다. 기아상태에 돌입한 몸은 숨 쉬고, 자는 것 외의 활동에 쉽게 지쳤다. 이씨는 “그때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인생 바꾼 제주 살이, 그리고 유튜브

이씨는 필사적으로 숨겼던 먹토를 고2, 3학년쯤 어머니에게 들켰다. 어머니는 “네 의지로 고쳐야 한다”며 이씨를 다그쳤고, 이씨는 “내가 정말 아픈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얼마 뒤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낸 카페를 통해 자신이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종 서적과 영상을 찾아보며 치료방법까지 공부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씨는 “그때까지도 폭력에 노출됐기 때문에 ‘난 이거 없으면 못 버텨’라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씨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2016년쯤이다. 당시 유행이었던 ‘제주 한달살이’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크게 좌절했을 때 “딱 한 번만 나를 위해 뭔가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떠난 제주행이었다. 이씨는 제주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며 한 달을 보냈다. 그는 “‘낯선 사람들과 새롭게 시작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채식 위주의 식단을 하고 몇 시간씩 올레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마음을 옭아매던 환경에서 벗어나자 구토를 한번도 안 하는 날이 생길 정도로 좋아졌다. 이씨는 제주 생활을 끝낸 지 2주 만에 유튜브에 먹토 고백 영상을 올렸다.

유튜브 4년차인 이씨는 일부 구독자와 ‘식단일기’를 공유하고 있다. 자신이 먹은 것, 구토 여부, 식사 당시 감정을 기록한 것인데 이씨가 먹토를 치료하기 위해 썼던 방법이다. 이씨는 구토 직후 느꼈던 감정을 포스트잇에 적어 화장실 문, 변기 주변에 붙여두기도 했다. “너는 괴물도 미친사람도 아니야. 그러니까 돌아설 수 있어.” 다시 토하고 싶을 때면 메모를 보며 참았다. 현재 이씨는 1년에 먹토하는 횟수를 손꼽을 수 있을 만큼 호전된 상태다.

게티이미지

“섭식장애는 정신질환, 편견 사라져야”

이씨는 “섭식장애인이라고 해서 심하게 말랐거나 과도한 비만만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잦은 폭식과 구토는 몸을 체중 감량이 어려운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마르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뜻이다. 이씨는 “미디어에서 극단적인 사례만 조명하는 게 문제인 이유는 정상 체중을 가진 섭식장애인이 ‘나는 저기에 해당하지 않아’라며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치료를 미루고,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증상 또한 토하지 않지만 계속 먹거나, 음식을 일부러 안 먹거나, 더 나아가 못 먹거나, 음식 자체를 혐오스러워하는 등 다양하다고 했다. 원인도 더욱 깊이 살펴봐야 한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이씨와 교류하는 구독자들도 이씨처럼 다른 이유로 먹토를 시작했다가 자연스레 체중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씨는 특히 “의지가 약해서라는 인식이 가장 문제”라며 “섭식장애도 우울증처럼 명백한 정신질환”이라고 했다.

이씨는 현재 대학원에서 상담심리치료학을 공부 중이다. 청소년 시기의 경험과 먹토가 진로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그는 “유튜브를 시작한 뒤 섭식장애로 고민하는 분들의 연락을 매일 받는다. 그만큼 숨어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라며 “이 문제를 자연스레 털어놓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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