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아마도 만병통치약인 글쓰기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아마도 만병통치약인 글쓰기

배승민 의사·교수

입력 2020-05-22 04:06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한 해 동안 쓴 일기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보내주셨다. 어느 날은 재미있거나 신이 나고, 또 다른 날은 한숨과 걱정인 날들이 모여 어느새 아이의 1년이 오롯이 보이는 글을 읽다 보니, 병원에서 만나는 글들이 문득 떠올랐다. 한정된 시간에 쫓기는 면담이 불만족스럽기는 치료자나 오시는 분들이나 마찬가지인지, 언제부턴가 진료 시간에 글들을 주고받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외래 진료실이든 회진 병실이든. 환자분이나 보호자분들은 나를 보자마자 능숙하게 적어온 공책을 펴거나,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어 보인다. 아이들은 꼬깃꼬깃해진 색색의 포스트잇을 우르르 쏟아놓기도 한다.

네모반듯한 나만의 치료제. 그 내용과 형태는 각각 달라서, 오래 두어 구깃구깃해진 종이쪽지일 때도 있고 따로 챙겨둔 묵직한 노트이기도 하다. 우울해도, 불안해도, 화가 나도, 공부가 안 되고 답답해도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정리한 그간의 삶이 천양각색의 보석같이 쏟아진다. 진료 시간에 쫓겨 아름다운 그 보석들을 하나하나 잘 줍지 못하는 부족한 치료자이지만, 귀하게 모인 그것들이 허투루 낭비되지 않도록 각자에게 잘 맞게 배열하고 정리해 드린다.

우리 모두는 가슴속에 이야기들이 있다. 바쁜 일상, 흘러가는 대화 속에 바람처럼 날려 보내다 보면 나나 남에게 상처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들.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의 한 귀퉁이도 좋지만, 이왕이면 나만의 노트가 있으면 좋겠다. 거기에 나만의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해 보자. 거창할 필요는 없다. 어디서든 쓸 곳과 도구만 있으면 된다. 요즘은 스마트폰 메모기능도 좋은 도구다. 큰돈과 수고를 안 들이고도 뇌와 마음을 정리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번잡한 도시 소음이 줄어든 요즘, 차 한잔 앞에 두고 짧게라도 나만의 글을 적어 보자. 잔잔한 바람 같은 심호흡 한번과 함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