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공분의 형태를 재고해야 한다

국민일보

[혜윰노트] 공분의 형태를 재고해야 한다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목수)

입력 2020-05-22 04:07

‘뉴스’, 시사와 관련한 뉴스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됐다. 어떤 계기로 뉴스를 읽고, 반응하는 행위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후다. 뉴스가 휩쓸고 간 자리를 살펴보면 그 당시의 내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경우들이 제법 많았다. 나의 반응이 누군가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뉴스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각성이 생겼다.

뉴스의 심층과 영향을 파악하는 것은 단단한 인문적 소양과 정확한 정보의 확인에서 나온다. 어쩌면 그 당연한 깨달음 이후 나는 되도록 뉴스를 접하는 시간을 줄이고 책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문적 소양을 쌓는 일이란 단기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내가 적절한 관점을 가지고 뉴스를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는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상업 활동을 하고 스마트폰을 쓰며 SNS를 활용하는 속인이 뉴스를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어떤 뉴스는 나의 관심이나 직업과 직접 닿아 있어 제법 깊게 들여다보기도 한다. 뉴스를 대하며 내가 가장 놀라는 것은 대중의 분노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과 같은 공적 채널은 물론 개인의 SNS까지 대중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정확한 사실관계가 드러나기도 전에 마치 ‘내 부모를 죽인’ 듯 가해지는 대중의 분노는 몹시 당황스럽다.

분노의 정도를 보면 그 사안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왔고, 자신의 개인적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오히려 해당 뉴스의 당사자나 단체에 대해 평소에 무심했던 사람들일수록 더 큰 분노를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설은 내게 뉴스의 진위보다 공분(公憤)이라 말해지는 대중의 분노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게 시켰다.

분노의 표출이 격렬할수록 공익과 도덕성이라는 가치가 앞에 나선다. 우선시돼야 할 사실관계의 확인과 해명은 뒤로 밀쳐진다. 공익은 ‘사익(私益)’의 공약수이며, 도덕성의 요구는 형평성을 전제로 한다. 공익의 이름으로 개인의 정당한 사익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누군가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요구하는 측 역시 그 도덕성을 유지하고 있거나 적어도 유지하려 애쓰고 있어야 한다. 도덕성은 사회적 ‘합의’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공분은 어떠한가? 어느 시대든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탄식은 후렴구처럼 존재했지만, 지금 이 시대가 지난 시대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공분의 실제 영향력이 커진 만큼 우리의 도덕적 성찰도 비례해 커졌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 공분의 형태가 대단히 위험하게 느껴진다.

임상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교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감을 회피하기 위해 사회적 문제에 사이비 도덕성 잣대를 들이대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한다”라고 지적한다. 공익과 도덕성을 앞세운 공분의 비합리적인 표출은 오히려 공익과 도덕성을 깃발 세우며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의 사익과 비도덕성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하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공익은 정당한 사익의 유지를 전제로만 구성될 수 있고, 도덕성은 형평성을 떠나 논할 수 없다. 의혹이 제기된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의 확인과 그들의 해명에 귀를 기울이는 기본적인 단계를 거치는 것은 공익과 도덕성의 적용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 전제를 지키지 않는 공분은 그 자체로 공익을 해치며, 도덕성을 상실한다.

전제를 잃은 공분의 표적이 된 많은 사람이 스스로 삶을 끊었다. 공익과 도덕성의 가치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 오히려 그 때문에 깨진 것이다. 사회적 공분은 한 사회를 유지하고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강력한 무기일수록 숙고와 통제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공분과 표출방식에 대해 고민해볼 때라고 생각한다.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목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