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닥치고 반일’만이 능사인가

국민일보

[가리사니] ‘닥치고 반일’만이 능사인가

조성은 정치부 기자

입력 2020-05-25 04:02

한·일 위안부 합의 타결 전날인 2015년 12월 27일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이 외교부 당국자로부터 어떤 내용을 들었는지는 대강 드러난 듯하다. 외교부 당국자는 윤 당선인에게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과 총리 명의 사죄, 일본 정부 예산 거출 등 우리 입장이 반영된 세 가지 항목을 통보했다. 하지만 일본 측 요구사항이었던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과 소녀상 이전, 상호 비판 자제 등 ‘굴욕적’ 조항은 은폐했다는 게 요즘 정설인 모양이다.

일본 측 요구사항이 합의 막판에 끼어들어간 탓에 윤 당선인에게 통보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과연 ‘의도적 은폐’인지 여부는 차치하겠다. 어차피 이튿날이면 만천하에 드러날 진실을 굳이 숨겨야 했을 속사정은 또 뭐였을까도 싶다. 다만 소모적인 논쟁 가운데서 당시 우리 측 협상팀이 가져온 성과를 마치 곁가지인 양 폄훼하는 주장이 나오는 데는 반론이 필요해 보인다. 대한민국의 대일(對日) 외교 입지를 위축하는 편협한 시각임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위안부 합의가 한·미·일 3국 간 야합의 결과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측이 받아낸 일본 정부 책임 통감과 일본 정부 예산 거출 조항만큼은 역대 과거사 해법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도의적 책임 인정과 일본 국민 성금 전달을 골자로 한 아시아여성기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며 이명박정부 시절 ‘사사에 안’보다도 진전됐다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문재인정부가 2018년 11월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이후 일본에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고 뭉개고 있는 것도 더 나은 합의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많다.

한·일 과거사 현안이 위안부 문제뿐이었다면 합의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 방치해 둬도 무방하다. 유감스럽게도 위안부보다 폭발성이 더욱 클 수 있는 강제징용 문제가 남아 있다. 문재인정부가 국민 눈높이를 맞추려면 위안부 합의를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강제징용 합의를 내놔야 할 것이다. ‘문희상 안’이 “위안부 합의와 뭐가 다르냐”는 비판 끝에 사장됐음을 되새겨보자. 한·일 외교 현실상 최대치였던 위안부 합의가 국민정서에서는 최소치조차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국내 정치 논리만 고려하면 차라리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을 강행해 한·일 관계를 파탄 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대외정책을 내부 정쟁의 종속변수쯤으로 여기는 사람들 중에서는 파국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있는 것 같다. 불순한 정치적 동기로 한·일 관계를 악용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소동에서 충분한 교훈을 얻었다.

윤 당선인은 합의 그날 성명문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지만 일본군 위안부 범죄가 일본 정부 및 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범죄라는 점은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일본 정부가 범죄의 주체라는 사실과 위안부 범죄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열망은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해 국가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이 이런 내용의 문서에 서명하는 날이 언젠간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은 외교 합의 서명식장이 아니라 항복문서 조인식장일 것이다. 한·일이 이제 와서 전쟁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걸어놓고 문제 해결을 영원히 유예한 거다.

문재인정부가 도출할 강제징용 합의가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금 지급’ 등을 관철하지 못하면 윤 당선인은 5년 전처럼 “국민의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이라고 질타할지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 이후 일련의 흐름으로 미뤄 대충 짐작 가는 데가 없지는 않다. 아무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버릇대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겠다(We will see what happens).

조성은 정치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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