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한명숙 구하기’로 열린당 전철 밟을 텐가

국민일보

[박정태 칼럼] ‘한명숙 구하기’로 열린당 전철 밟을 텐가

입력 2020-05-25 04:01

유죄 확정 판결 뒤집기 시도는 오만과 독선에 의한 법치 유린
여당의 황당한 주장엔 노림수 담겨…
검찰·사법 개혁 동력, 특별사면 위한 수순인 듯
민주당이 할 일은 터무니없는 구명 아닌 ‘윤미향 폭탄’ 제거


더불어민주당은 4·15 총선에서 압승한 직후 오만을 경계하며 겸손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면교사로 열린우리당을 소환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힘입어 과반 의석(152석)을 확보했지만 무리하게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 입법에 나섰다가 야당과 충돌하고 당내 분란도 심화돼 2007년 해체된 열린우리당을 환기한 것이다. 지난달 17일 선거대책위 해단식에서 이해찬 대표는 열린우리당의 아픔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했고, 이낙연 공동상임선대위원장도 국민 앞에 오만이나 미숙, 성급함이나 혼란상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모처럼 성숙한 여당의 모습을 보여준 장면이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면서 공룡 여당의 오만 DNA가 꿈틀대기 시작한 걸까. 난데없이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한명숙 유죄’ 뒤집기에 나섰으니 말이다. 지난 20일 여권 핵심부가 일제히 한명숙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촉구하고 나선 것은 법치를 부정하는 꼴이라 황당하다.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먼저 불을 질렀다. 그는 한 전 총리를 강압 수사와 사법 농단 피해자로 규정하고 검찰·법원이 명예를 걸고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일에 즉시 착수하라고 주문했다. 같은 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의원 질의가 나오자 정밀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화답했다. 짜놓은 각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양새다.

재조사 이유로 내세운 것은 고(故) 한만호씨의 비망록이다. 한 전 총리는 2007년 건설업자 한씨로부터 9억원을 받은 혐의로 2010년 기소돼 1심 무죄, 2심 유죄로 엇갈리다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됐다. 한 전 총리 동생의 전세자금으로 사용된 한씨 수표 1억원이 유죄의 결정적 증거였다. 문제의 옥중 비망록은 검찰의 강압과 회유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고 허위진술을 했다는 내용인데 재판 과정에서 제출돼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판정받았다. 그런데도 최근 친여 매체가 비망록을 보도하자 여당이 새로운 증거인 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정녕 한 전 총리가 억울하다면 본인이 새로운 증거를 확보해 재심을 청구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 비망록은 이미 사법적 판단을 받은 것이라 재심 사유조차 되기 어렵다.

이를 뻔히 아는 여권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은 다른 노림수가 있기 때문일 게다. 그 누가 얘기했듯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확실히 느끼도록 해주는 효과가 있다. 177석의 막강한 파워를 가졌으니 잔소리 말고 고개 숙이고, 차후 함부로 칼날을 들이대지 말라는 신호다. 검은 그림자는 어른거리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아울러 강압 수사 의혹을 부각시켜 검찰 개혁의 동력으로 삼을 태세다. 검찰 정기인사(7월)도 예고돼 있다. 사법 농단에도 불구하고 진척이 더딘 법원 개혁에도 드라이브를 걸 수 있다. 당시 수사팀을 7월 출범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 대상으로 거론하는 이도 있으나 직권남용 공소시효(7년)가 만료됐기에 그건 억지에 가깝다. 물론 검찰을 괴롭힐 카드로는 유효하긴 하다.

종국에는 특별사면을 통한 한 전 총리의 명예 회복이 진행될 것이다. 한 전 총리는 친노(親盧) 진영의 대모(代母)다. 여권 인사들로선 한 전 총리가 2년간 옥살이를 한 데 대해 부채 의식이 크다. 공론화를 통해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동정 여론을 유발하고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단행하는 수순으로 마침표를 찍을 것 같다. 한 전 총리는 엊그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자신의 결백을 재확인했다. 적절한 시기에 입장을 밝히겠단다. 수순대로 흘러간다. 그렇다고 유죄가 무죄로, 범법자가 양심수로는 바뀌지 않는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거대 여당의 하늘을 찌르는 오만과 독선만 드러낼 뿐이다.

도 넘은 검찰·법원 때리기의 가장 큰 문제는 법치 유린이다. 입법권력이 사법체계를 뒤흔들면서 사법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제 제기가 왜 오만한 것이냐고 되물으니 여론의 역풍이 두렵지도 않은가 보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과거의 전철을 밟을 조짐이다. 지금 민주당이 우선적으로 할 일은 ‘한명숙 구하기’가 아니라 각종 회계 부정 의혹 등에 휩싸인 ‘윤미향’이라는 시한폭탄을 제거하는 것인데 앞가림도 못하고 있다.

박정태 수석논설위원 jtpark@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