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스웨덴, 천국의 그늘

국민일보

[돋을새김] 스웨덴, 천국의 그늘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입력 2020-05-26 04:04
스웨덴에서는 요즘 이 사람 문신이 이슈다. 스웨덴 정신의 정수로 추앙받는 남자.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스웨덴 모델의 상징. 유럽 전역이 전면봉쇄에 들어갔을 때 스웨덴에서 카페와 체육관, 학교가 문을 열고 일상이 평온하게 이어지도록 결단한 인물. 한 줌의 흥분도 없이 건조하게 통계수치를 읊으며 국민을 안심시키는 전문가 리더십의 아이콘. 국민건강청의 수장인 감염병학자 안데르스 테그넬이다.

스웨덴 젊은이들은 코로나 사태를 기억하겠다며 팔에 그의 얼굴을 문신한다. 기념품점에는 테그넬 얼굴이 찍힌 머그와 T셔츠, 휴대전화 케이스, 에코백에 아기옷까지 출시돼 인기를 끈다. 신문은 테그넬의 인생 스토리를 전파하고, 그의 사무실은 시민이 보낸 꽃으로 도배가 됐다. 노래까지 헌정됐다. 유튜브에는 ‘모든 파워를 테그넬에게’라는 제목의 데스메탈 음원이 공개돼 있다. 이토록 스웨덴다운 송가라니. 음원 설명을 보면 테그넬이 범인(凡人)에서 스웨덴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여정이 언급돼 있다. 감염병학자와 메탈과 위인전의 조합.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인기는 명함도 못 내밀 참신한 팬덤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스웨덴 모델은 스웨덴 밖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뒤 전 세계가 각자의 방식과 모델로 코로나19에 대처해 왔고, 중간 성적표는 나라별 감염 그래프와 치명률로 이미 나온 상태다. 스웨덴의 인구 100만명당 감염자는 25일 기준 3315명으로 영국·이탈리아보다 낮지만 독일·프랑스보다는 확연히 높다. 더 심각한 건 사망자 수다. 스웨덴 치명률은 12%로 이웃 노르웨이(2.8%)보다 4배 이상 높다. 심지어 공공의료의 악몽으로 불리는 미국(6%)을 웃돈다.

사망자 절반은 요양시설 거주자였다. 한편에서는 요양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이민자들이 감염고리가 됐을 거라는 추측이 나왔다. 인력 부족을 걱정한 정부가 시설 스태프에 대한 진단검사를 주저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젊은이의 일상이 유지되는 대가로 노인들 목숨이 희생됐다고 비난받을 만한 상황이다. 이런 희생을 감내한 결과, 목표했던 집단 면역력이 생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스웨덴 내부의 지지는 이상하리만큼 견고하다. 최근 과학자 22명이 비판적 공동 칼럼을 게재하면서 벌어진 소동이 대표적이다.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직후 온라인은 얼굴격인 여성 바이러스 학자의 괴상한 헤어스타일과 히스테리컬한 목소리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찼다. 침착한 남성 전문가 테그넬과 감정적인 반(反)스웨덴주의 여성학자의 대결 구도 속에서 정책 토론은 증발했다. 스웨덴 정부는 옳다는 믿음, 틀린 건 나머지 세계라는 자신감, 스웨덴식 예외주의에 대한 신념은 반대 목소리에 대한 열렬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스웨덴의 힘인 정부와 시민 간 굳건한 신뢰가 해법을 찾는 과정 자체를 원천봉쇄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짜 놀라운 건 이런 민족주의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노르딕의 맏형, 리버럴 좌파가 주류를 점한 사회민주당의 스웨덴에서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어느 스웨덴인의 탄식처럼, 전 세계 집단지성보다 극소수 스웨덴 전문가들이 더 우월하다는 스웨덴인의 믿음은 어쩐지 미국의 트럼프주의자들과 닮아 있다. 안 그래도 미국 극우주의자들이 요즘 미는 구호가 “스웨덴처럼(Be Like Sweden)”이란다. 이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한국의 이상주의자에게 스웨덴은 도달하고픈 미래였다. 하지만 유토피아에도 유효기간은 있다. 천국을 만든 방정식은 그대로 비극의 레시피가 되기도 한다. 정답이 바뀐다는 걸 잊는 순간,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번에 스웨덴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인 듯싶다.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ymle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