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사랑은 간격에서 온다

국민일보

[청사초롱] 사랑은 간격에서 온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입력 2020-05-27 04:04

아내가 예전 같지 않다. 나이 쉰을 넘기면서부터 아내의 성정과 감성은 느릅나무 껍질처럼 두껍고 딱딱해져서 비집고 들어갈 여지를 주지 않는다. 찔레 순처럼 부드럽고 연했던 아내가 어찌 이리도 강팔라졌을까? 우리 부부는 신혼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싸워왔지만 요즘 들어서 벌이는 싸움은 예전 같지 않게 자못 심각하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이제 시효가 다해 무용한 옛말이 돼버린 지 오래다. 나이 들어서 하는 부부 싸움은 선혈이 낭자하게 마음의 살(肉)을 베기 일쑤여서 치명적인 상처와 독을 남기게 된다. 그러니 가급적 싸움을 피해야 한다.

아내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소한 일에도 잘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다 내 과업(過業) 때문이다. 나와 연을 맺고 살아오면서 부지불식간 나로 인해 생긴 울화가 쌓였다가 도져 마치 홍수에 둑이 터지듯 분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탓해서는 안 된다. 내색하지 않고 살고 있어서 그렇지 나 같은 사정을 지닌 채 사는 중년 이후 부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언쟁을 하고 나면 억울할 때가 없지 않다. 젊은 날 적수공권으로 상경해 일가를 이루기 위해 온갖 유형무형의 적들과 싸우며 애써온 그 숱한 세월을 좀체 인정해주지 않는 아내가 서운해 원망스럽기 때문이다.

5월은 기념할 일이 많은 달이다. 기념하는 일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축하할 일도 있지만 아픔을 새기자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부부의 날’(5월 21일)은 어떤가? 오죽하면 부부를 기념해야 할까? 그만큼 부부간 갈등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나는 어쩌다 쓰는 글에 관성적으로 성찰이나 반성의 내용을 담을 때가 있는데, 솔직히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나 자조감에 낯이 뜨겁다. 추상 수준에서 이뤄지는 성찰이나 반성이 스스로 생각해도 뻔뻔하고 겸연쩍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도 그러한 자기혐오의 감정 상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다.

살붙이나 친연 관계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갈등과 싸움은 대개가 ‘사이’ 혹은 ‘간격’의 결핍에서 오는 때가 많다. 특히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은 ‘심리적 거리두기’의 실패에서 오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상대의 감정을 자기 것인 양 소유, 지배하려는 경향에서 불화가 빚어진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면 ‘존재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소유로서의 사랑’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인 것이다. 예컨대 산에 피어 있는 꽃이 아름답다 하여 그 꽃을 꺾거나 모종삽으로 옮겨와 화분에 심어 놓고 자기 취향이나 기호대로 가꾸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간섭이요, 억압이요, 폭력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소유로서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와는 다르게 존재로서의 사랑이란 산에 있는 상태의 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우리는 전자의 경우를 사랑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와 아내, 나와 자식 간 불화의 원인도 대부분 이 거리두기의 실패 즉, 소유로서의 관계를 사랑으로 착각한 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은 그동안 내 가부장적 권위의식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짓눌려 질식해 왔던 것이다. 아내와 아들의 반란은 내게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데서 온 것이니 누구를 탓하랴.

다도해의 섬들이 환상적인 것은 섬들의 형상들이 주는 매력에서라기보다는 섬과 섬의 간격이 주는 조화 때문일 것이다. 한겨울 수십만 마리 가창오리 떼는 한꺼번에 군무를 추며 날아오르면서도 어느 한 마리 다치지 않는다. 간격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는 간격에서 온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야 보배다. 아무리 훌륭한 깨달음도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관계의 화를 줄이는 일은 호상(互相)간 간격을 지키는 일이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