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기부를 배신하다

국민일보

[여의도포럼] 기부를 배신하다

이진우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입력 2020-05-28 04:04

목적과 명분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면 목적을 타락시킨다. 요즘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기부’ 이야기다. 하나는 기부를 독려하는 명분과 관련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기부금의 정당한 사용을 둘러싼 이야기다. 정부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긴급재난지원금을 모든 국민에게 지원하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기부하라고 독려한다. 지원하면서 동시에 다시 기부의 형식으로 거둬들이는 기이한 방식은 기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명분이 좋으면 기부를 강요해도 좋은 것인가?

재난지원금을 기부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와중에 기부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단체 ‘정의기억연대’가 기부금을 불투명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이 먹구름처럼 짙어지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 앞세워 모은 돈을 어디에 썼느냐?”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에게 제기한 이 질문은 기부의 효과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명분이 좋으면 기부금을 마음대로 써도 되는가?

재난지원금 기부는 좋건 싫건 실행되고 있고,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로 촉발된 윤미향 사태는 집권 여당의 말처럼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니 여기서 말을 더 보태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의 관심은 이러한 사건들로 야기될 도덕의 타락 현상이다. 기부는 일정한 공익 목적을 위해 재산을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행위를 말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공감해 그들의 상태가 나아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도와주는 인도주의적인 행위가 기부다. 그러니 기부가 자연스럽게 많이 이뤄지는 사회는 비교적 좋은 사회다.

고통보다는 행복을 더 많이 가져오고, 남에게 해가 되는 행위보다는 이로운 행위가 많이 이뤄지는 사회가 도덕적으로 좋은 사회라면, 기부는 도덕적 행위의 근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고통을 덜어주든 아니면 공익을 증대시키든, 기부는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는 기부의 ‘자발성’이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구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도덕성이라고 하지만, 공감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기부금을 모으고 싶다면, 내세우는 명분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명분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명분은 퇴색돼 정당성을 상실할 수 있다.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은 지원금을 지급할 제도를 마련하는 대신 정부가 담당해야 할 재원과 행정비용을 ‘자발적 기부’라는 꼼수로 강제하는 것은 기부의 취지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기부의 의미가 바뀔까 두렵다. 기부가 공익의 이름으로 도덕성을 판매해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는 행위라는 의미로 변질된다면, 기부는 사라질 것이다.

기부의 둘째 전제조건은 ‘효율적 투명성’이다. 내가 취지와 명분에 공감해 제공한 기부금이 목적에 맞게 효율적으로 투명하게 사용된다는 신뢰가 있다면 기부는 분명 확산될 것이다. 공감과 같은 감성에만 호소하는 이타주의보다는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검증하는 ‘효율적 이타주의’가 세상을 실제로 개선한다고 한다. 기부금이 실제의 목적보다는 행정비용에 많이 쓰인다거나 목적과 관계없이 불투명하게 사용된다면 기부의 의미는 타락한다. 윤미향 사태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적 타락 현상에 대한 태도와 반응이 더 우려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도덕성을 자랑했던 수구 좌파의 반응은 조국 사태 때와 똑같다. 별거 아니란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이 단체가 내세운 명분과 이제까지의 활동에 비춰 볼 때 제기된 문제는 사소하다는 것이다. 비판의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어용 언론인들은 정치적 공작의 냄새가 난다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대의’와 ‘명분’의 이름으로 은폐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도덕을 배신하는 도착(倒錯) 행위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하고 고쳐가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

이진우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