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백신이 만들어지면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백신이 만들어지면

입력 2020-05-29 04:01

코로나 백신이 완성되면
누가 먼저 맞을 것인가
신종플루 당시 선점 경쟁
이번에도 재연되고 있다
백신 분배는 고도의 과학
공평 분배가 훨씬 효과적
국제적·사회적 합의 통해
합리적 보급안 미리 마련하길


백신은 결국 만들어질 것이다. 사스와 메르스 백신이 아직 없는 것은 개발되기 전에 잦아들어 투자에 김이 빠졌기 때문인데, 코로나19는 그럴 것 같지 않다. 팬데믹이 돼버렸고 2차 유행이 예견됐다. 백신 개발의 제1 조건인 수요가 소멸될 리는 없어 보인다.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도 않다. 바이러스 염기서열이 밝혀진 지 넉 달 만에 성공적인 임상시험 소식이 들려왔다. 120종 백신이 연구되고 있으며 10종은 임상 단계에 들어섰다. 성급한 사람은 올 연말, 신중한 사람도 내년 말까지는 백신이 나올 거라 말한다. 이제 그 이후를 고민할 때가 됐다. 백신이 완성되면, 누가 먼저 맞을 것인가.

백신의 기능은 두 가지. 감염을 막고 확산을 막는다. 백신을 접종하면 바이러스에 면역이 생기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그 집단이 면역을 갖는다. 집단면역이 작동하기 위해선 구성원의 70%는 백신을 맞아야 하는데, 세계 인구의 70%가 접종하려면 생산의 한계 탓에 최소 1년 이상 걸린다. 세계 각국이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에 설 수밖에 없다.

2009년 신종플루 팬데믹 때 그랬다. 바이러스가 퍼지고 7개월 만에 백신이 나왔을 때, 그 줄의 순서를 정한 것은 돈과 힘이었다. 생산 초기 제한된 물량을 잘사는 나라들이 선점했다. 제약 업체에 막대한 개발비를 미리 제공하고 선주문 권리를 확보하는 식이었다. 호주처럼 백신을 만드는 나라가 국내 수요를 해소할 때까지 수출을 틀어막기도 했다. 선진국들이 저개발국을 위한 백신 기부를 서약했지만 그 약속은 자국의 접종이 마무리된 뒤에나 지켜졌다.

이번에도 같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인도 제약 업체 세럼은 영국 옥스퍼드대학이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을 벌써 만들기 시작했다. 효능이 검증되기 전에 생산부터 하는 도박에 나서면서 “생산량은 대부분 인도에서 소비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영국 정부는 옥스퍼드와 협업 중인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에 거액을 투자해 백신 3000만개를 이미 확보했다. 미국은 단독 개발을 진행하면서도 아스트라제네카(영국) 사노피(프랑스) 큐어백(독일) 등 대형 제약사마다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으며 미래의 백신을 쓸어 담고 있다.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됐을 때 HIV 바이러스가 가장 창궐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충분한 치료제를 손에 넣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부자 나라들이 약을 기다리는 줄의 앞자리를 죄다 차지한 탓이었다. 수백만명이 그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이런 현실을 알았던 인도네시아는 2006년 조류인플루엔자 사망자들에게서 채취한 바이러스 샘플을 세계보건기구(WHO)에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자기네 샘플로 백신이 개발돼도 줄서기에서 뒤로 밀릴 게 뻔하다며 “백신이 만들어지면 우리가 먼저 혜택을 봐야 한다”는 샘플 제공 조건을 내걸었다.

백신은 고도의 과학인데, 일단 만들어지면 이렇게 정치의 영역이 되곤 했다. 빌 게이츠가 줄기차게 “공평한 백신 분배”를 말하는 건 박애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바이러스 퇴치에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국경과 계층을 구분하지 못하는 바이러스 앞에선 모두가 안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 모두가 안전해지는 빠른 길은 백신이 가장 필요한 곳부터 사용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규모, 감염 인구 비율, 고위험 인구 분포, 확산의 길목이 될 지리적 환경, 백신을 낭비하지 않을 행정력 등을 정밀히 따지는 과학적 분배의 기법을 국제사회는 이미 알고 있다. 합의하지 못할 뿐이다. 이 분배의 룰은 백신이 완성되기 전에, 누가 만들어낼지 아직 알 수 없는 지금 합의돼야 한다. 그것은 한 국가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2009년 독일 정부는 신종플루 백신 확보를 앞두고 접종 우선순위를 이렇게 정했다. ①의료진 ②고위험 기저질환자 ③임산부 ④감염자의 가족 ⑤고위험 연령층.

영화 ‘컨테이전’은 그런 준비가 없을 때 국제사회에서, 또 같은 국민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줬다. 영화 속 감염병도 결국 백신으로 해결되는데 그 과정이 무척 고통스럽다. 백신을 차지하려는 폭동과 약탈, 인질극이 벌어진다.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로또 같은 생년월일 추첨으로 백신을 분배했다. 이런 차선책을 꺼내기 전에 과학의 기준을 들이대면 모두가 수긍하는 합리적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코로나 사태를 소름끼치도록 정확히 예언했다는 이 영화가 백신 개발 이후의 상황만큼은 정확히 그려내지 못했기를 바란다.

태원준 편집국 부국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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