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면이 깨끗해야 말씀 통로되며 예수님 향기

국민일보

자신의 내면이 깨끗해야 말씀 통로되며 예수님 향기

정광재 목사의 형상회복 <7> 배설물이 가득 찬 항아리

입력 2020-06-0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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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재 다메섹교회 목사(왼쪽)가 지난달 13일 경기도 고양 대화노인종합복지관에서 복지관 관계자로부터 다메섹지역아동센터에서 사용할 컴퓨터를 전달받고 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부르셨다. 항아리를 하나씩 주시며 주님의 창고에 있는 보화를 마음껏 항아리에 담아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다. 문제는 이 항아리에 똥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열심히 항아리를 씻는데 한 사람은 속을 열심히 씻고 또 한 사람은 겉만 씻는다. 그뿐 아니라 겉치장에 열과 성을 다한다. 항아리 속에는 배설물이 가득해 움직일 때마다 속에 있는 배설물이 흘러나와 악취를 풍기는데 겉만 대충 씻고 온갖 화려한 보석을 갖다 달며 장식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5~26)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항아리를 피하지만 눈치 없는 그 사람은 똥항아리에 계속 치장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주님은 속이 타시지만 오래 참으시고 바라보고 계신다. 제발 이제부턴 속을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속을 씻어야 보화를 담을 수 있는데 이미 때가 저물어 간다. 주님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주님께서 몇 번을 부르셨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듣지를 못한다. 겉치장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아니 말씀을 자기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열심히 하라는 줄 알고 겉치장에 더 열심을 낸다.

그 행동을 멈추고 주님을 바라보면 자신의 모습이 보일 텐데 겉치장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다 보니 정작 봐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똥항아리의 겉치장에 즐거움을 느낀다. 똥항아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야, 멋지다. 모든 게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은 헛웃음을 지으신다.

우리도 이처럼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겉치장, 자기만족에 열심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마치 주님의 뜻인 양 착각하며 주님의 마음을 애타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면이 청결해야 비로소 주님의 온전한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삼상 16:7)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외모, 스펙, 세상적인 지식과 성공, 혹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종교적인 열심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만족을 위한 종교적인 열심에 스스로 속고 있다.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같다.(마 23:25)

신앙의 본질은 내면의 회복, 마음의 청결이다. 하나님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이 정화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늘 시험으로 넘어지고 세상의 것에서 손을 놓지 못한다. 당연히 하나님과 깊은 교제도 어렵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우를 범한다.

주님이 하시는 내면의 정화 작업에 자신을 맡길 때 성령님의 비추심과 만지심이 있다. 우리의 내면이 회복돼야 하나님의 온전한 통로가 돼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창조와 생명의 역사는 내면의 청결을 통해 시작된다. 내면의 청결을 이루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빛을 발한다. 예수 향기가 나며, 회개가 터진다. 진정한 복음이 전해진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온전히 사용되지 못함은 외적 능력이나 은사 등 그 어떤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내면의 청결을 온전히 이루지 못해서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빛의 자녀답게 내적 거룩을 사모하며 말씀을 붙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자야, 항아리 안을 깨끗이 하여 사람들에게 보화를 가져다주렴. 그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들은 나의 신부, 나의 사랑이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오늘을 살게 하심은 더 높은 권세를 갖게 하심이 아니다. 낮은 곳에 시선을 두어 누군가의 기도 응답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루를 허락하신 것은 더 나은 명예를 얻으라고 하시는 게 아니다. 가난하고 후미진 곳에 마음을 두어 그들의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되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해 주신 이유는 더 많은 물질을 축적하라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가난하고 어려운 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처럼 분명하다. 부족한 자신의 무언가를 채우려 함이 아니라 수고와 슬픔뿐인 자들의 마음에 동감하는 것이다.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루를 허락하셨다. 그리스도인의 하루는 온 삶으로 드리는 예배 그 자체가 돼야 한다.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사랑의 법으로 내면이 변화돼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의 삶이 돼야 한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릴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만지실 것이다. 내면의 온전한 회복을 통해 주님의 아름답고 정결한 신부로 세워지길 기도하자.

▒ 성령께서 인도하는 목회
형제복지원서 빼내더니 중국집 배달원으로 보내

1984년 형제복지원에서 나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집도 아니고 고아원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이모라고 부르게 한 여자친구의 남동생이 운영하는 중국집 동원각이었다. 그곳에서 배달원의 삶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나는 그곳에서 부산진구 당감동 주소를 외우며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했다. 월급도 받지 못하고 1년 넘게 음식 배달을 했다.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기 전인 80년엔 벧엘고아원에서 몰래 나와 칠천각이라는 부산에서 제법 큰 규모의 중국집에서 일했다. 그걸 알고 있던 아버지는 배달원이 필요한 그곳에 나를 보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던 형제복지원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나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그때만 해도 영문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교도소보다 더 힘든 환경에서 살았기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간 줄 알았다. 훗날 형제복지원 사건이 이슈가 되고 나서야 죄 없는 사람들이 불법 감금됐던,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음을 알게 됐다.

동원각에서의 삶은 고됐다. 하지만 중국집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9살 때 벧엘고아원에서 나와 중국집에서 일했던 생활습관이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팠던 벧엘고아원 단체생활의 얽매임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순진한 마음에 자장면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중국집에서 일했는데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칠천각 사장은 구두쇠였다. 사장은 손님이 먹던 나무젓가락을 세탁세제로 씻어 말려 직원들에게 주고 사용하라고 했다. 짬뽕, 만두 등 다양한 중식 요리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거기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늘 불어터진 자장면이었다.

어느 날 만두를 배달하다가 너무 먹고 싶어 2개를 먹고 손님에게 배달했는데, 발각됐다. 주방장에게 국자로 머리를 맞고 다시 만두 2개를 배달했다. 그 집이 5층에 있었는데, 맞은 곳이 너무 아파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구두쇠 사장과 엄한 주방장은 만두가 먹고 싶었던 어린아이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달랑 2개만 튀겨 배달하라고 줬다. 그걸 다시 철가방에 넣고 뛸 때 마음이 참 서글펐다.

또래 아이들이 구구단을 외우고 학교에서 공부할 때 나는 배달을 했다. 주방장에게 수타 기술을 배운다고 머리를 얻어맞으며 면을 만들었다. 그때 그 기술로 가끔 다메섹교회 성도들에게 중국 요리를 손수 만들어 대접할 때가 있다. "목사님, 너무 맛있어요." 맛있게 먹는 성도들을 보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어린 나이에 벧엘고아원에서 자주 탈출했던 이유가 있다. 배고픔 때문이었다. 후원하는 선교사들이 사과 50상자를 갖고 고아원에 찾아오는 날이 있었다. 기쁨과 설렘도 잠시, 고아원 아이 78명이 사진을 찍고 나면 사과 1개 먹는 것으로 그 기쁨이 끝이 났다. 더이상 사과를 먹을 수도, 사과 상자를 구경할 수도 없었다. 원장이 그 사과를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고아원 원장도 장로였지만, 어린 내가 볼 때도 '저런 모습으로 살지 말아야지' 다짐할 정도였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의 경험은 현재 목회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2004년 목회를 시작하면서 다메섹지역아동센터를 설립했다. 소외되고 어려운 아이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를 '아빠'라 부르며 반갑게 달려드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이 자리 잡길 바란다.

나의 인생은 어릴 적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훈련 과정이었다. 그 경험이 지금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영적 자원이 돼 주님의 뜻대로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어려움과 아픔과 상처는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돼 주님의 사역을 위한 영적 자원이 됐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돼 나타남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 있었음을 자주 느낀다.

정광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