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정원은 인간을 꿈꾸게 한다

국민일보

[너섬情談] 정원은 인간을 꿈꾸게 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입력 2020-06-03 04:01

유월이다. 어느새, 여름이다. 아내랑 함께 걷는 산책길 풍경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노란 개나리가 봄을 열고, 분홍 벚꽃이 봄을 끌며, 붉은 철쭉이 봄을 물들이더니, 흔적도 없다. 연둣빛 잎들은 한층 커지고 자라서 진녹색으로 바뀌었다. 잔잔졸졸 듣는 귀는 시원하고, 울울창창 보는 눈은 상쾌하다.

크고 작은 꽃들로 정성껏 꾸며 놓은 정원도 아름답다. 꽃을 만날 때마다 구글렌즈로 찍어 이름을 알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꽃 모양이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어 올리면, 알아서 검색해 비슷한 꽃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인공지능의 힘이 신통방통하다. 옹벽을 타고 장미가 늘어지고, 가파른 비탈에는 금계국이 찬란하다. 푸른 풀밭 위로 새빨간 개양귀비가 유혹하고, 비슷해 보여도 제각각 이름이 다른 제비꽃들이 풍성하며, 층층이 꽃을 여는 온갖 빛깔 글라디올러스도 신기하다.

정원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합일을 가져오도록 기획된 거대한 기계이고, 인간이 이룩하려는 예술의 극치이기도 하다. 17세기 프랑스 학자 쥘 와트레는 정원에 배치된 꽃을 두고 “외적인 사물과 감각과 영혼의 상태 사이의 가장 완전한 관계를 기초로 하는 예술”이라고 말했으며, 같은 시기 중국 문인 이어(李漁)는 “호수와 난이 나를 부르니 온 집안이 그림 속으로 이사 왔다”고 정원을 예찬했다. 바람에 날리는 꽃향기는 영혼을 천상으로 이끌고, 잘 꾸민 풍경은 마음이 신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하게 한다. 정원의 기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정원을 뜻하는 영어 단어 ‘garden’은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어 ‘gan’은 ‘울타리로 둘러싼 공간’을, ‘oden’ 또는 ‘eden’은 ‘기쁨’을 뜻한다. 두 단어 모두 창세기 2장 8절에 나타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히브리인들에게 정원은 신의 선물이다. 신이 직접 울타리로 둘러싸고 그 내부를 부족함 없이 꾸며준 ‘기쁨’과 ‘즐거움’의 공간이었다.

인류 최초의 기록 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에 따르면, 신들의 땅 역시 정원 모양을 하고 있다. “청금석 잎사귀가 달려 있었고, 과실이 달려 있었고 보기에도 좋았다. (중략) 들장미와 가시 같은 홍옥수… (중략) 눈을 들어 보니 신들의 정원이었다.” 영원히 사는 법을 물으려 ‘머나먼 곳’까지 여행 중인 길가메시 앞에 갑자기 푸른 잎과 붉은 꽃이 어우러지고 갖가지 과일이 굶주림과 목마름을 씻어주는 아름다운 공간이 나타난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정원은 인류의 낙원이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인류가 꿈꾸던 지상천국 형태로 존재했다.

한마디로 정원은 신의 공간이다. 인류의 피는 붉지만 인류의 기억은 푸르다. 인간의 지식은 회색이지만, 생명의 나무는 녹색이다. 우리 안에는 정원의 이미지가 깊게 각인돼 있다. 빈터만 있으면 식물을 심어 꾸미고, 땅 한 줌 없는 아파트에서 화분에 꽃을 기르며, 사무실 책상에 손가락 선인장이라도 올려두려는 충동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진짜 동력이다. 정원 없는 도시는 쓸쓸하고, 식물 없는 집은 생동감이 없다. 벽돌 틈에 난 꽃을 보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인간답지 않다.

공공 정원(public garden)이 요즈음 도시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빈터에는 꽃과 풀을 심어 가꾸고, 다리에는 꽃바구니를 매달아 장식한다. 정원은 이중적이다. 현실이면서 상상이요, 인공이면서 자연이다. 현실의 힘으로써 이룩한 환상의 공간이고, 상상의 힘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실제의 장소다. 작은 정원은 시멘트로 뒤덮인 도시 공간의 척박한 질서에 실금을 낸다. 실용에만 매달리는 마음의 천박한 방죽에 구멍을 뚫는다. 틈새에 이룩한 작은 우주 속에서 산책하거나 머무르면서, 우리는 일상 너머에 있던 자연의 경이를 감각하고 사유하고 상상한다. 정원은 우리를 꿈꾸게 한다. 시민의 꿈은 현실을 바꾼다. 현실은 꿈을 좇아야 비로소 고귀해질 수 있다. 작은 정원이 늘어나는 것, 정녕 반가운 일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