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야구장에서

국민일보

[창] 야구장에서

김철오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입력 2020-06-06 04:05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관객을 들이지 못한 야구장 관중석 일부는 기자와 구단 직원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 송파구 잠실구장 타석 바로 뒤 중앙 지정석 한가운데에 앉은 어느 하루는 수첩 두 개를 펼쳐놓은 뒤 하나에 기사로 쓸 경기 상황을 기록하고, 다른 하나에 들려오는 소리들을 적었다.

국민의례에서 애국가가 연주되고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방송이 울려 퍼지면 선수와 심판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선다. 적막이 가장 짙은 순간은 홈팀 투수의 초구 직전이다. 이때 중앙 지정석 주변에서 초구를 포착하려는 사진기자들의 셔터음이 적막의 긴장감을 이완한다. 영화 상영을 앞둔 극장의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영사기처럼 귀를 기분 좋게 간지럽히는 소리다.

곧 들려오는 ‘퍽’ 소리. 포수의 미트로 빨려 들어가는 둔탁한 소리다. 공이 타자의 방망이에 맞으면 ‘딱’ 하는 경쾌한 타격음이 난다. 그날은 초구가 미트로 들어갔다. “경기가 시작됐구나.” 그제야 실감한다. 동작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기록하고, 그렇게 쌓은 통계로 역사를 쓰는 종목이 야구라면 무관중의 야구장에서 처음으로 생동감을 불어넣는 건 결국 초구에 반응하는 소리다.

이제 홈팀 응원단의 차례다. 치어리더가 선수마다 가사를 다르게 쓴 응원가를 부르면 고수는 북소리로 장단을 맞춘다. 응원단과 동행하지 않은 원정팀 선수단은 3루 방향 더그아웃에서 요란한 환호성과 박수로 맞선다. 홈팀 응원단과 원정팀 더그아웃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응원 소리는 심판의 판정 구호와 뒤섞인다.

그날은 무슨 영문인지 5회말이 끝나자 헬리콥터 두 대가 잠실구장 상공을 가로질러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날아갔다. 육중한 프로펠러의 굉음이 조명등 주변을 맴돌던 벌레들을 사방으로 흩어 놓는다. 벌레들은 관중석이 텅 빈 야구장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소음을 낸 인간에게 항의라도 하려는 듯 중앙 지정석으로 날아들어 기자와 구단 직원 주변을 배회하며 붕붕 소리를 낸다.

그렇게 반복되는 타격음, 응원가, 북소리, 판정 구호, 더그아웃의 환호성, 장내 방송, 셔터음, 틈틈이 들려오는 헛기침과 누군가의 대화, 혹은 전화통화, 바람에 펄럭이는 기록지, 노트북 컴퓨터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리는 소리…. 운이 좋으면 타석에서 오가는 대화도 나지막하게 들을 수 있다. 이 소리들을 나열한 수첩에 오직 관중의 함성만을 기록하지 못했다.

프로야구는 흥행이 저조했다는 지난해만 해도 경기당 평균 1만119명의 관중을 유치했다. 야구장엔 관중의 우렁찬 함성이 메아리쳤고, 그 함성이 야구의 일부를 장식했다. 관중은 경기에 영향을 미친다. 국내에서 코로나19를 극복하고 프로리그를 시작한 야구·축구·골프에 모두 해당하는 얘기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플로이드 올포트는 타인의 존재만으로 수행의 성과가 향상되는 효과를 ‘사회적 촉진(social facilitation)’으로 정의했다. 경기장에서 함께 질주하는 동료부터 객석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는 관객까지 여러 종류의 타인이 선수의 경기력을 향상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해 힘을 내기 어려웠다’는 선수의 푸념은 그저 박약한 의지를 감추려는 핑계나 입장권 수익 악화를 걱정하는 상업주의보다 타인의 고무와 격려로 수행의 성과를 높이려는 사회성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 사회는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표준을 찾아가고 있다. 그 안에서 ‘달라진 세상을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세계 스포츠계는 올림픽을 사상 처음으로 연기하면서 개최국의 안위나 대회의 권위보다 선수의 안전을 택하는 선례를 남겼고, 대규모 총회를 화상회의로 대체해 시간과 자본을 절약하는 실용적 표준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표준으로 대체되지 않는 것도 확인했다. 스포츠에서 팬의 개념이 그랬다. 세계 대부분의 프로리그에서 대안으로 채택되고 있는 ‘무관중 생중계’는 팬의 무게중심을 ‘관객’에서 ‘시청자’로 전환하는 시도로 이어졌지만, 경기를 거듭할수록 간절해진 것은 되레 관중의 함성이었다. 결국 관객이 객석을 채울 것이다. 그러려면 코로나19부터 이겨내야 한다. 당분간은 서로의 허리춤을 쿡쿡 찌르며 감염을 경계하는 노력이 계속돼야겠다.

김철오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kcopd@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