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중앙은행에 대들지 마라

국민일보

[내일을 열며] 중앙은행에 대들지 마라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입력 2020-06-04 04:03

“중앙은행에 대들지 마라(Don’t challenge central bank).” 6년 전 퇴임 직전의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마지막 금융통화위원회를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던진 말이다. 당시 금통위를 앞두고 채권시장에서 가계부채 문제 해결 등을 위해 금리 압박이 심해진 데 대해 “시장에서는 중앙은행의 정책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그것이 예상대로 안 되면 중앙은행을 공격한다”며 발끈한 것이다. 중앙은행 금리 결정을 보고 단타성 차익거래를 하기도 하고 폰지를 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시장 참가자들의 투기 행태를 나무라기도 했다. 어느 나라든 기준금리 결정을 앞두고 시장과 중앙은행 사이엔 팽팽한 ‘밀당’이 오가기 마련이지만 꾸준히 선문답으로 에둘러 왔던 김 총재가 경제학자들 사이에 속설로 통하는 이 말로 반격에 나선 것은 두고두고 시장에 회자됐다.

요즘 전 세계 금융시장을 보면 시장 참가자들이 중앙은행에 대들기는커녕 신뢰감마저 보내는 듯 환영일색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실업률이 치솟고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치닫고 있음에도 주식시장은 3월 폭락 후 랠리를 지속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비롯한 주요 중앙은행들이 시장 안정을 위해 무제한 유동성 공급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락한 천사(Fallen angel)’, 즉 신용등급이 투자부적격으로 강등된 회사들의 정크본드까지 중앙은행이 매입에 나서는 전례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좀비기업 양산 등 모럴 해저드 얘기라도 꺼내려 들면 “때가 어느 때인데”라며 눈흘김을 당할 정도다. 몸집이 비대해지는 만큼 중앙은행의 한마디 한마디에도 갈수록 무게감이 더 실릴 수밖에 없다. 금융시장을 부축하느라 2조2000억 달러를 쏟아부은 미 연준의 지난 1분기 자산(6조6000억 달러)은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30%를 넘어섰다. 미 의회에서 준비 중인 4차 부양책까지 동원하면 연말쯤엔 50%에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경기침체 장기화다. 아무리 발권력으로 무장한 ‘미다스의 손’이라도 장기 침체는 중앙은행의 운신 폭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 미 의회예산국(CBO)이 2일(현지시간) 경제 회복에 10년이 걸릴 수 있다고 경고에 나선 점은 예사롭지 않다. U자 반등은 고사하고 W자(재침체) 반등을 예고한 셈이다. 유동성 함정에 빠진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도 또 거론된다. 현재로선 소비가 정체돼 있어 디플레가 고민거리지만 통화 남발은 언제든 급격한 인플레로 이어질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리쇼어링마저 가세할 경우 물가를 더욱 자극할 공산이 크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려야 함에도 국채 이자를 부담스러워하는 정부 압박을 과연 중앙은행이 견딜 수 있을까. 연준처럼 기축통화인 달러를 마구 찍어낼 형편이 안 되는 한은으로서는 고민이 더 클 것이다. 장기금리를 고정시켜 놓고 국채를 찍는 YCC(수익률곡선통제) 도입이나 당좌대월계좌를 통해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단기신용제도(WMF) 도입은 일본 영국 같은 나라에나 적합하지 우리는 언감생심이다.

기업 투자와 세수가 늘지 않는 한 ‘전시재정’을 선언한 정부의 빚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그 부담은 한은 몫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치인 연 0.5%로 내렸지만 실효하한에 도달한 것으로 보여 경기부양 효과도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기준금리 인하는 결국 3차 추가경정예산 35조원 가운데 23조원 상당의 국채 인수를 위한 사전준비 수순이라는 해석이 그래서 나온다. 시장 참가자들의 유동성 랠리 환호성이 언제 중앙은행에 대한 야유로 바뀔지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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