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재벌권력 압도한 검찰권력의 독선

국민일보

[박정태 칼럼] 재벌권력 압도한 검찰권력의 독선

입력 2020-06-08 04:02

수사 계속 심사엔 영장청구 등 향후 절차도 포함된다고 봐야
불기소 여부 묻는데 기소 전제 구속영장 청구는 가당찮아
이재용 영장은 수사심의위를 허수아비 만든 비상식적 처사
법원 결정과 별개로 검찰의 아집이 개혁 시급성 각인시켜

“그동안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의 공정성에 대해 안팎으로 여러 우려가 있었습니다. 검찰은 이러한 우려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검찰로 거듭나기 위해 사회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검찰수사심의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2018년 1월 문무일 검찰총장이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설립 취지와 관련해 쓴 글 중 일부다. 문재인정부가 검찰 개혁을 밀어붙이자 문 총장은 자체 개혁 방안으로 무소불위의 검찰권을 견제할 수사심의위 제도를 도입했다. 수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수사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을 외부에 살짝 개방한 것이다. 대상은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다. 수사심의위는 사법제도 등에 대한 학식과 경험을 가진 150~250명의 전문가로 구성된다.

문 총장의 글 중 핵심은 국민 신뢰 제고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권한을 내려놓고 위원회 운영지침을 마련해 ①수사 계속 여부 ②공소제기 또는 불기소 처분 여부 ③구속영장 청구 및 재청구 여부 ④공소제기 또는 불기소 처분된 사건의 수사 적정성·적법성 등에 관한 판단을 시민에게 맡긴 것이다. 이 중 ①②④항은 피의자 등 사건 관계인이 신청할 수 있고, 검찰은 4가지 모두 심의를 요청할 수 있다.

경영권 승계 의혹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측이 ①②항을 신청한 건 이 규정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전격적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초강수로 반격했다. 이미 방침이 결정된 데다 ③항은 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이는 자구에 매몰된 형식 논리에 불과하다. ③항이 아니더라도 ①항의 수사 계속 여부에는 영장 청구를 포함한 향후 수사 절차가 모두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게 마땅하다. 만일 수사심의위가 수사 중단을 결정하고 검찰이 그에 따른다면 영장 청구는 불가능하다. ③항의 구속영장 청구 여부는 수사를 계속하되 구속 수사를 할 건지, 불구속 수사를 할 것인지 판단하는 부분이다. 이걸 검찰에만 요청 대상으로 부여한 건 증거가 부족하거나 다툼의 여지가 있음에도 구속 여론이 높아 진퇴양난에 빠질 때 인신 구속에 신중을 기하라는 취지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인사보복 의혹의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사건이 이 경우다. 결과적으로 구속 기소 의견이 나와 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에서 기각됐다. 그래서 ③항은 영장을 청구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지를 묻는 검찰 방어용 기제로 봄이 합당하다. ②항의 불기소 처분 여부를 묻는데 기소를 전제로 한 영장을 청구한 것은 난센스다.

전체적 맥락에서 봤을 때 구속영장 청구는 검찰의 독선으로 ①②항 심의를 무력화하고 수사심의위를 허수아비로 만든 것이다. 영장 청구 방침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내부 문제일 뿐이고 수사심의위 소집 신청 절차가 시작됐다면 유보하는 게 상식이다. 이 부회장 수사는 1년7개월을 끌었다. 부의심의위원회의 소집 결정을 거쳐 수사심의위 결론까지 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르면 2~3주 안에 끝날 수 있다. 도주 우려, 증거 인멸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서 그걸 못 기다리고 당장 인신 구속을 하겠다고 나서는 건 설득력이 없다.

이 부회장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면 수사심의위가 수사 중단 또는 불기소 처분으로 결론 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운영지침에 심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만 돼 있어 심의 결론을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다고 검찰이 반박할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2018년 1월 수사심의위 설명자료에는 ‘심의효력에 사실상 기속력 부여’라고 명시해 놨다. 이를 부정하면 검찰권 남용 논란만 부른다. 그간 8차례 소집된 수사심의위 결론을 검찰이 모두 따랐던 것도 이 때문일 게다. 하지만 검찰의 비정상적인 이번 대응은 수사심의위 존립 근거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제도를 도입했으면 그 취지에 맞게 운영해야 한다. 수사 지연책이든, 여론 호도책이든 간에 제도를 이용하려는 피의자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해선 안 된다. 이 부회장을 봐주자는 것도 아니다. 중대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에 상응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영장 발부 여부는 오늘 법원이 엄정하게 판단하겠지만 그 결과와 별개로 검찰은 절차적 정당성도 갖춰야 한다. 독선과 아집은 검찰 개혁의 시급성을 국민에게 각인시켜줄 뿐이다. 국민 신뢰를 스스로 저버렸다.

박정태 수석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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