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고 술은 약하다는 말은 사실 구조 요청 메시지였다”

국민일보

“혼자 살고 술은 약하다는 말은 사실 구조 요청 메시지였다”

[책과 길]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이원하 지음, 달, 220쪽, 1만4000원

입력 2020-06-18 18:34

첫 시집부터 이만큼 관심을 끈 시인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시집 제목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지난 4월 세상에 나온 책은 출간 일주일 만에 3쇄를 찍었다. 요즘도 시집 중에선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시집의 주인공은 이제 등단한 지 2년이 된 이원하(31·사진)다.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은 이원하가 발표한 첫 산문집으로 첫머리엔 시집과 같은 제목이 달린 짤막한 글이 등장한다. 그는 “혼자 살고 술은 약하다는 말은 사실 구조 요청 메시지였다”라고 고백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간추리자면 이런 내용이다.

시인은 흠모하던 남자에게 손으로 이마를 가리면서 이마를 내놓고 다니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다. 남자는 저 말이 ‘앞머리’를 갖고 싶다는 뜻이라고 여겨서 가위를 들고 나타나 싹둑, 시인의 앞머리를 잘라준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남자는 제주를 떠나버린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눈썹을 겨우 가리는 앞머리가 과연 어디까지 자라야 그 남자가 다시 제주에 올까요. …내 얼굴이 별로 안 예뻐서 제주에 안 오나 싶어 종일 거울만 본 날도 있었어요. 거울을 봐도 안 오고, 거울을 두드려도 안 오니 편지 아닌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 편지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해요. 저 아직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산문집에는 이처럼 인상적인 글이 한가득 담겨 있다. 시인은 마음에 드는 이성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을 땐 상대의 머리카락을 먹으면 된다는 말이 있어서 그 남자의 머리카락을 삼킨 적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조금 더 비밀스럽게 만들면 그게 ‘시’가 돼요”라고도 말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래서 외로운 마음이 행간 곳곳에 진하게 묻어나는데 궁상맞게 느껴지진 않는다. 음흉한 이야기도 귀엽게 풀어낸다. 이렇게 개성 넘치는 에세이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독특한 감흥을 자아내는 문장이 많은데, 이런 대목이 대표적이다. “나는 그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를 감추고 싶은 거예요. 곁에 두고 나만 보고 싶어요.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건 나도 알아요. 알지만, 모든 사랑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이기심을 빼면 남는 건 없다고도 생각해요. 이기적인 만큼 내가 그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면, 그에게도 행복이 아닐까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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