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성도·피난민, 눈물의 기도로 뜨거웠다”

국민일보

“목회자·성도·피난민, 눈물의 기도로 뜨거웠다”

[6.25전쟁 70주년] 96세 정진섭 장로, ‘의의 피난처’ 부산 초량교회 구국기도회 회고

입력 2020-06-2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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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섭 연평필승교회 장로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부산 초량교회에서 열린 구국기도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 장로가 24일 연평도 자택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다. 정충권 장로

1950년 6월 25일, 연평도의 26세 청년 정진섭은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듣고 위기를 직감했다. 서둘러 짐을 싸 아내와 함께 포구로 향했다. 친척의 통통배에는 정원 5명의 배인 10명이 탔다. 뱃길은 험했다. 부산까지 가는 데 꼬박 열흘이 걸렸다.

96세 노인이 된 정진섭 장로는 24일 전화인터뷰에서 “6·25때는 재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행동해야 했다”며 피난길 이야기를 들려줬다. 부산에 도착했지만, 피난민이 몰려들어 묵을 곳이 없었다. 통통배가 집이 됐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신앙생활은 멈추지 않았다. 초량교회를 찾아갔는데, 예배당 안과 앞마당, 어린이집까지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초량교회 목사와 성도들은 결혼예물까지 팔아가며 이들을 섬겼다. 정 장로는 “초량교회는 ‘의의 피난처’였다”며 “주먹밥을 줬는데 맛을 못 느낄 정도로 정신없이 먹으면서도 너무나 감사했다”고 말했다.

초량교회 구국기도회에 참석한 목회자와 성도들의 모습. 초량교회 제공

그해 8월 30일쯤, 낙동강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때 초량교회에서 구국기도회가 시작됐다. 당시 한상동 담임목사와 고려신학교 교장인 박윤선 목사가 ‘전국 피난민 교역자들을 위한 집회’를 열자고 한 게 계기였다. 초량교회에는 부산으로 피난 온 250여명의 교역자가 경남지사였던 양성봉 장로의 주선으로 머물고 있었다. 일주일간 새벽기도와 성경공부, 저녁집회를 갖기로 하고 이들 교역자에게 메시지 전달을 맡겼다. 재정은 종군기자 겸 선교사로 한국을 찾은 월드비전 설립자 밥 피어스 목사가 지원했다.

정 장로는 “빨간 벽돌의 2층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목회자, 성도, 피난민의 눈물로 늘 뜨거웠다”고 기억했다. 정 장로의 아들이자 초량교회 역사위원장인 정충권(63) 장로도 “전란 와중에 회개와 자성의 운동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역사위원장을 역임한 곽원섭(72) 장로는 “목사님들은 6·25동란을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진노의 칼’이라며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요청했다”며 “기도회 사흘째에는 교회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기도회 첫날 한상동 목사는 신명기 11장을 본문으로 신사참배, 광복 후 교권 다툼, 한국교회가 범한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 보수신학자인 박형룡 박사도 11차례 설교했다. 이들 설교문은 ‘박형룡박사 저작전집’ 18권에 남아 있다.

박 목사는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인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악”이라며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회복됐을 때도 죄에 대한 반성과 통회의 태도가 희미해 사분오열됐고 교회의 혼란은 심해졌다”며 회개를 촉구했다. 손양원 목사도 9월 13일 기도회에서 설교할 예정이었지만,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이라는 설교 제목만 남긴 채 좌익에 붙잡혀 오지 못했다.

예정을 넘겨 진행된 기도회는 15일 마무리됐다. 그날 부산 전역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알리는 호외가 배포됐다.

곽 장로는 “역대하 7장을 보면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하나님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한다”며 “6·25 때도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았기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북한이 도발하고 있지만, 위기 가운데 전심으로 기도했던 믿음의 선배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부산=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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