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천사가 되는 법

국민일보

[혜윰노트] 천사가 되는 법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입력 2020-07-10 04:02

커피를 좋아하고,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 일을 시작하려면 아무래도 커피가 있는 편이 든든하다. 출근길에 아이스 라떼를 사서 마시기도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동네 로스터리 카페에 들러 핸드 드립용 원두를 산다. 그럴 때면 나에게 커피를 알려준 10년 전의 ‘커피 천사’가 생각나곤 한다.

회사를 시작할 무렵, 서울시의 청년 창업 공간에 책상 두 개를 지원받았다. 매일 출근을 했지만 일이 없었고, 회사 전화를 마련했지만 벨은 좀처럼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뭔가를 하느라 바빴고, 막차를 타고 퇴근하면서도 힘든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매출이 없어도 비용은 발생했기 때문에 커피 한 잔도 아끼는 생활을 해나가던 중 행운이 찾아왔다.

어느 날 사무실로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 이름이 없는 수상한 상자를 열어보니 커피 원두와 함께 메모가 들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커피 평론 일을 하고 있어 늘 혼자 마시기에는 많은 양과 종류의 원두가 있습니다. 예술가들 또는 예술가를 위해 일하는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보내드립니다. 우선 1년 동안 보내드릴 예정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세요.”

이후로 격주마다 2~3팩의 커피 원두가 꾸준히 배달되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원두를 갈기 위한 핸드 밀과 핸드 드립 기구를 마련했고,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는 일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루틴이 됐다. 믹스커피와 저렴한 티백 대신 콜롬비아, 과테말라, 케냐, 브라질, 코스타리카 타라주,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에티오피아 시다모 등의 이름을 가진 커피를 두루 마시게 되자 절로 호연지기가 길러지는 듯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늘 맛있는 커피만은 충분했고, 작은 사무실은 기분 좋은 커피 향으로 가득했고, 그건 당시 나의 일상을 지켜주는 큰 힘이 됐다.

택배비까지 본인이 부담하면서 익명으로, 1년 반이나 지속된 선행의 수혜자가 되고 나니 더 이상 염세주의자로 살 염치가 없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성실한 응원에 대한 고마움과 하루를 잘 지내보겠다는 용기가 자라났다. 주위에 그녀를 설명할 일이 있을 때면 ‘커피 천사’라고 불렀고, 감사의 표시를 할 길이 없었던 나는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주변에 미담의 주인공들이 더 있다. 이번에는 우리 회사 이사님의 이야기다. 유난히 추운 겨울날 시골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기름이 하나도 없어 다음 날에야 겨우 보일러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몇 년 후 본인이 다른 곳으로 나갈 때는 다음에 이사 올 사람들을 위해 보일러 기름을 가득 채워주고 나왔다. 감동한 새 집주인은 만나기를 청했고, 이후로도 좋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미담은 또 다른 미담을 야기한다. 카페를 하는 친구 한 명은 나의 ‘커피 천사’ 이야기를 듣더니 본인도 실천하겠다며 모 시민단체에 커피 정기 후원을 시작했다. 언젠가 미국 뉴욕에 공부하러 간 예술가에게 내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티켓을 선물한 것도, 뉴욕에 처음 갔던 나에게 뮤지컬 티켓을 보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못한 기쁨을 주는 것, 그 순수한 선행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내가 대가를 받지 않는 좋은 일은 사회로 그 대가가 돌아간다.

요즘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은 참담한 뉴스들이 쏟아지는데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실망하고 화를 내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곳곳에 소소한 미담들이 흘러넘치는 상상을 해본다. 오늘도 내일도, 뉴스에서 매일 훈훈한 사연들을 만나게 되면 어떨까. 나에게 커피를 보내준 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은, 그런 고마운 마음이 쌓이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오늘은 당신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 당신을 마음에 간직하고 ‘천사’라 부를 것이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포토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