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의 문학스케치] 비밀의 의미

국민일보

[손홍규의 문학스케치] 비밀의 의미

입력 2020-07-25 04:02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받은 위로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인이 된 최인호 선생과 관련이 있다. 여러 해 전 당신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쯤 나를 불렀다. 친분이 있는 게 아니어서 뜻밖이기는 했지만 후배 소설가를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해 듣고 찾아뵙기로 했다. 나는 동료 소설가와 함께 약속 장소로 선생을 뵈러 갔다. 선생은 침샘암으로 몇 년째 투병 중이었던 터라 죽과 같은 음식물만 겨우 섭취할 수 있다고 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어려운 몰골이라 함께 밥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차 한 잔을 마시자고 했다.

목에 수건을 두른 선생은 힘겹게 찻잔을 들어 아주 조금씩 마시면서 당신에게는 여전히 풋내기일 두 소설가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신이 읽은 우리의 소설에 대한 감상부터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지녀야 할 태도와 용기 등을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나는 처음 만났음에도 진심이 담긴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쩌면 이것이 하나의 유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선생이 힘들어 한다는 걸 느꼈다. 우리는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도 우리를 전송하기 위해 계단까지 나왔는데 나를 붙잡더니 부드럽게 껴안았다.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너, 왠지 슬퍼 보여. 너무 아파하지 마.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가 움직이기라도 하면 투병으로 야위어진 선생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당신은 나를 힘껏 껴안지 못했으나 어떤 포옹보다 단단하게 느껴졌고 그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선생의 말은 그 순간만의 나를 가리키는 건 아니었을 거다. 그리고 그 말이 분명하게 들리는 것만큼이나 비밀스럽게 느껴진 이유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그 말을 곱씹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럴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내가 위로받았던 그때를 떠올리면 선생의 단편소설 ‘술꾼’ 역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술집에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면서 꾀죄죄한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은 어른 술꾼들에게 아버지 이름과 생김새 등을 설명하며 보았는지를 묻고 어른들은 모르겠다고 한다. 소년은 익살을 부리면서 어른들이 주는 술을 냉큼 받아 마신다. 소년은 또 다른 술집으로 찾아가 아버지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어른들은 다시 소년에게 술을 한 잔 주고 그곳을 나온 소년은 또 다른 술집으로 향한다. 소년은 점점 취해간다. 이쯤 이르면 어떤 독자라도 소설 제목인 술꾼이 가리키는 술꾼이 어른들이 아니라 바로 이 소년을 가리키는 것임을 눈치 챌 수밖에 없다.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아버지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는 핑계를 대고 술집마다 돌아다니며 한 잔씩 얻어 마시는 영악한 소년이 바로 진짜배기 술꾼인 셈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비틀거리는 소년이 고아원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들어서는 광경이 묘사된다. 여태껏 소년이 거짓말로 아버지를 찾아다녔음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소년의 비밀은 여기에서 완벽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또 다른 반전이 준비돼 있다. 고아원으로 향하는 소년은 정말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라고 중얼거린다. 이 중얼거림이야말로 소년의 비밀이 또 다른 비밀이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이 거짓말쟁이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라는 중얼거림은 소년이 술집에서 했던 말이 어쩌면 정말로 소년이 겪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소년은 어머니가 피를 토하며 집에서 죽어가는데도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느라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나선 적이 있는 것이다.

사실 비밀은 폭로되는 순간 더 이상 비밀일 수 없다. 대부분의 소설은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완성되지만 선생의 소설은 폭로돼 더 이상 비밀일 수 없는 사실이 또 다른 비밀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므로 비밀이 밝혀졌다고 해서 그 비밀이 그 사람을 온전히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 비밀은 인간적인 시선으로 다시 해석돼야 하고 그때 비로소 참된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소년이 술꾼인 동시에 비참한 고아이며 여전히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서글픈 존재이듯이. 너, 왠지 슬퍼 보여. 너무 아파하지 마. 이 말이 언제까지나 내게 비밀로 남게 됐듯이.

손홍규 소설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