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센 언니

국민일보

[내일을 열며] 센 언니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입력 2020-07-23 04:02
배우 제인 폰다가 2019년 10월 25일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후위기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에 체포돼 끌려가고 있다. AP뉴시스

시베리아의 섭씨 38도 폭염, 한 달 넘게 이어진 중국의 물폭탄, 80년 뒤에 멸종될 거라는 북극곰…. 기후위기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잠시 옆길로 새버렸다. ‘기후위기 투사’로 거듭난 ‘센 언니’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2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시상자로 등장해 “수상작은, 기생충!”을 외치고 봉준호 감독을 포옹했던 배우 제인 폰다다. 올해 83세.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멋있으면 다 언니인 거다. 아카데미상을 두 번 수상한 관록의 배우인 그는 최근에는 환경운동가로 더 유명해졌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 시위로 바뀌었지만 지난해 10월부터 매주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불법 시위로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을 수차례 연출해 자기 이름값을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적극 활용했다.

제인 폰다는 1960~70년대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흑인·장애인 인권운동, 여성운동으로 진작부터 화제를 모았으니 ‘개념 스타’의 원조 격이다. 그러나 명배우였던 아버지 헨리 폰다의 후광을 업은 ‘할리우드 금수저’라는 선입견에, CNN을 세운 언론 재벌 테드 터너와 결혼하면서 배우 생활을 접었던 게 페미니즘 활동가답지 않아 보여 개인적으로 그의 팬은 아니었다.

그러나 “체포돼서 영광입니다”라며 플라스틱 수갑을 찬 두 손을 들어 보이는 기후위기 시위 영상에 매료됐다. 연달아 찾아본 그의 인터뷰와 강연 동영상, 기사들은 눈부셨다. 2005년 활동을 재개한 그는 미디어에 여성의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될 수 있도록 여성 NGO인 우먼스미디어센터를 공동으로 세워 분야별 여성 전문가 데이터베이스인 ‘쉬소스(Shesource)’를 만들었다. 기사나 방송에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할 때 문의할 만한 여성들의 명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남성 전문가들 일색인 언론 현실을 타파해보겠다는 취지다. 투표권처럼 ‘미디어 노출권’도 쟁취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노년의 삶에 대해 말한 TED 강연에서는 “까칠한 할머니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항상 있었지만 정작 늙게 되니 지혜와 충만함을 얻었다”고 했다. 또 “노령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인구비율을 차지한다. 우리가 변하면 세계에 문화적 변동이 일어날 것이고, 젊은 세대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제인 폰다는 또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30년이 걸렸다”며 “60대가 돼서야 비로소 이 운동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국내에서 처음 성희롱 승소 판결을 끌어낸 자타공인 페미니스트가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고, 자칭 ‘페미니스트 법률가’라는 여성 검사는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피해자를 조롱했다는 비판을 사는 세상이다. 제인 폰다의 말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건 쉽지만 페미니즘을 체화하는 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SNS에는 사회에 대한 폭넓은 시선과 관심, 자신이 믿는 가치에 대한 헌신이 가득했다. 가장 최근 게시물은 지난 20일 미국 200여개 도시에서 열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동맹파업 ‘흑인 생명을 위한 파업(Strike for Black Lives)’ 동참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자신과 81세 여배우 릴리 톰린이 주인공인 드라마 ‘그레이스 & 프랭키’의 포스터도 있었다. 할머니 투톱을 내세운 작품이라니, 이 유례없는 드라마를 여섯 번째 시즌이 방송되도록 몰랐다. 이혼 후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할머니 이야기라는데, 볼을 맞대고 꼭 껴안은 두 여배우 사진 뒤의 문구가 ‘함께 일어서자, 함께 봉기하자’는 뜻의 ‘Rise up together’다. 이번 주말의 즐거움은 이 드라마로 정했다.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