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에 대한 추상화와 예술가의 상상력이 바탕이다

국민일보

기술에 대한 추상화와 예술가의 상상력이 바탕이다

[아트 & 테크] <3> 공연예술

입력 2020-08-01 04:06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세계적 서커스 단체 ‘태양의 서커스’에 자주 등장하는 무대 플라잉 기술은 이미 3000년 전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도 나오고 있다. 공연예술은 고대 시대부터 이미 기술을 무대에 활용했다. 무대 위 기술의 활용은 중세 시대에도 이어졌다. 당시 글을 읽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성경 속 이야기를 들려줄 때 화염 등 특수효과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영국 런던 브리스톨 올드빅 극장에서 천둥 소리를 내기 위해 천장에 나무 트랙을 만든 뒤 돌을 굴려 관객을 놀라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효과는 아직도 극장에서 사용된다.

특히 극장은 첨단 신기술이 바로 도입되는 공간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이탈리아 올림피코 극장은 가장 오래된 실내 공연장이자 프로시니엄 극장의 원형인데, 당시 회화가 발명한 공간 재현 원리인 원근법을 적용했다. 산업혁명 시대가 되면 그동안 극장의 자재가 목조와 돌이었던 것이 전기의 발명과 함께 가볍고 튼튼한 강철 골조로 바뀐다. 덕분에 높은 무대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됐으며 모터나 전기의 힘으로 무대세트를 상부 또는 하부로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게 됐다.

20세기 말 정보화 혁명을 통해 무대의 자동화도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뮤지컬 공연을 위해 예전에는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이 극장 피트 안에 들어가 연주해야 했지만 지금은 사운드 디자이너가 작업실에서 만든 음악트랙을 활용함으로써 적은 수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도 연주가 가능하게 됐다. 음악만이 아니라 조명 등 모든 무대기술에서 자동화가 진행돼 왔다.

이런 기술의 도입이 예술인들의 일자리가 위협한다는 시각도 있지만 공연예술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새로운 기술을 수용해 나갈 전망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디지털에 기반해 다양한 기술의 융합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가적으로 ‘D.N.A.(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 생태계 강화가 추진중인데, 예술 분야에서도 온라인 창작 등 디지털 작업이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영국 국립극단(NT)의 ‘어글리 라이즈 더 본(Ugly Lies the Bone)’은 영화 ‘인셉션’처럼 실제 지형 데이터를 사용해 3면의 입체 공간으로 도시를 표현했다. 사실적 영상효과를 무대세트에 더하기 위해 레이저 3D 스캐너도 활용했다. 영국국립극단

공연예술 분야에서 가상현실(VR) 또는 혼합현실(MR) 기술의 적용은 관람객이 특수 안경이나 헤드셋을 착용해야 하며 이를 운영하는 인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현재로선 상당히 제한적이다. 2017년 영국 국립극단(NT)의 ‘어글리 라이즈 더 본(Ugly Lies the Bone)’은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입장에서 기술을 효과적으로 수용한 좋은 사례다.

‘어글리 라이즈 더 본’은 전쟁에서 얼굴을 크게 다친 상이용사가 집으로 돌아온 뒤 겪는 트라우마를 소재로 한다. 가상현실을 중심으로 한 통증제어 요법이 기술적 모티브로서 도입됐다. 관객이 가상현실 속 장면을 실제 무대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가상현실 같은 무대세트 디자인을 구현했다. 영화 ‘인셉션’처럼 실제 지형 데이터를 사용해 3면의 입체 공간으로 도시를 표현했다. 또 사실적인 영상효과를 무대세트에 더하기 위해 레이저 3D 스캐너까지 활용했다.

NT는 실제 참전용사의 트라우마 치료를 돕기 위해 공연장 로비에 VR 서비스를 준비해 관객들에게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작품에서 놀라운 것은 현재 VR과 증강현실(AR) 그리고 MR의 기술적 제약을 연출가, 디자이너 등 창작진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작진은 기술을 메타적 혹은 추상적으로 받아들인 뒤 다시 예술가의 관점에서 무대 연출에 사용했다. ‘어글리 라이즈 더 본’의 사례는 예술가가 기술적 안개로 가득찬 영역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나선 사례로 볼 수 있다.

독일의 경우 칼스루에의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센터인 ZKM과 슈투트가르트의 아카데미 슐로스 솔리투드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웹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주목된다. 전 세계에서 선정된 작가들은 특정 기간 ‘웹’ 상에 거주하며 디지털 아트, 인터페이스, 프로그래밍, 네트워킹 등 각종 실험을 한다. 특히 디지털 큐레이터가 소개하는 기술을 창작에 적극 활용한다. 이렇게 창작된 작품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이 로렌 매카시와 캐스퍼 쉬퍼의 ‘24시간 호스트(24 HOUR HOST)’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이틀 동안 파티에 참여하되 인공지능(AI)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게 한다. AI 알고리즘이 관객의 떠날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데, 인간과의 소통 유무에 따른 관객의 행동을 이해하도록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런 예술적 접근은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 뿐만 아니라 실제 기술 전문가들에게도 미학적인 접근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24시간 호스트’가 개인 예술가들의 창작 사례로서 의미 있지만 많은 관객을 수용하는 공연예술 분야에서 기술과 예술의 효과적인 융합은 쉽지 않은 문제다. 이와 관련 영국은 국가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혼합현실 헤드셋, 온라인 스트리밍 기술을 활용한 몰입형 경험 기술의 발전을 위해 1억6000만 파운드(약 2500억원)의 기금이 투자됐으며 공공 예술기관, 민간 예술단체, 연구소 등 15개 기관과 단체가 관련 연구 및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가 진행한 MR연극 ‘세븐 에이지스 오브 맨’의 장면. 영국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RSC)도 디지털 플랫폼에서의 몰입형 실황 공연을 선보여 왔다. 지난해엔 가상현실 디스플레이 회사 매직 리프(Magic Leaf)와 손잡고 MR연극 ‘세븐 에이지스 오브 맨(Seven Ages of Man)’를 선보였다. 혼합현실 헤드셋을 통해 봐야 하는 ‘세븐 에이지스 오브 맨’은 디지털 상에서 나무가 자라는가 하면 배우의 연기를 360도로 감상할 수 있는 등 MR공연 가운데 가장 세련된 영상미를 보여준다. 연극을 넘어 새로운 장르로도 인정받는 이 작품은 공연장이 아닌 사무실, 방 등 개인의 공간에서도 관객이 완성도 높은 연극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유명 래퍼 트래비스 스콧이 게임 속 가상현실에서 아바타의 모습으로 콘서트를 진행하는 모습이다. 에픽게임즈

국내에서도 공연예술의 창작이나 관객의 관람 형태를 새롭게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돼 왔다. 필자가 이끄는 Ghost LX는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해외 디자이너와 효과적 협업을 위해 얼굴 인식 아바타로 소통하는 비디오 컨퍼런스 기술을 시도했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적극 활용해 혼합현실이나 가상현실을 통한 미팅에 참여하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은 최근 공연에서도 활용되는데, 지난 4월 미국 유명 래퍼 트래비스 스콧이 포트나이트 게임 속 가상현실에서 아바타의 모습으로 콘서트를 연 것은 대표적이다. 이 콘서트에는 전 세계에서 1230만명이 몰렸다.

Ghost LX는 관객이 공연에서 좀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실제 공간을 온라인 상에 똑같이 만든 뒤 예매 좌석에서 무대를 미리 살피거나 관객이 다가갈 수 없는 무대세트 등을 탐색하는 기술을 시험운영 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을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이라고 부르는데, 배우와 스태프 입장에서는 사전에 가 보지 못한 공연장을 미리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상의 공간에서 측량도 가능하기 때문에 무대세트 등 공연 제작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공연예술계의 기술 도입은 고대 시대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들이 아직 활발하게 공연예술에서 활용되는 것은 아니며 성공 사례가 많지도 않다. 하지만 코로나19가 4차 산업혁명을 더욱 가속화 했고, 공연예술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국내에서도 많은 젊은 공연예술가들이 그동안 기술에 관심을 가져 왔다. 특히 코로나19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더욱 주목을 받으면서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융복합 작품 지원 비중도 높아질 전망이다. 지금이야말로 공연예술인들이 기술에 대한 소통과 창작에서의 활용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시점이다. 중요한 것은 최근 해외 창작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기술을 기존의 창작에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기술과 사회의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고민하고 이를 추상화하여 예술가만이 접근할 수 있는 창작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류정식 감독
◎ 류정식 감독은
류정식은 Ghost LX 스튜디오의 예술감독이자 공연공간 전문 건축가, 융복합 다원예술 작가그룹 Mechane의 일원이다. 아시아 최초 미국무대기술사로서 북미무대기술표준그룹의 실무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국내 공연기술 분야의 국제화와 관련 연구를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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