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세상 즐거움 버리고 조선의 전염병과 싸우다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세상 즐거움 버리고 조선의 전염병과 싸우다

닥터 셔우드 홀과 고성 김일성 별장

입력 2020-08-0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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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완공된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의 성’ 풍경. 의료선교사 윌리엄 홀 부부의 아들 셔우드 홀 부부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 사역을 했던 셔우드 부부는 일제 말 미국으로 쫓겨난다. 이어 남북이 갈리면서 김일성 별장이 됐다. 원래 2층이었으나 군 관리 시기 3층으로 증축됐다.

‘김일성 별장’

강릉과 속초를 찾는 이들이 안보관광 코스로 잡는 곳이 김일성 별장이다. 이 별장은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과 더불어 패키지로 묶인다.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 때 부통령이었다. 이 세 곳의 별장 가운데 관광객은 주로 ‘화진포의 성’이라고도 불리는 김일성 별장을 찾는다. 해안 절벽의 성채 같아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이곳을 기준으로 이기붕 별장이 130m, 이승만 별장이 1㎞ 지점에 있다.

지난 7월 말. 폭우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즐기려는 많은 사람이 ‘화진포의 성’을 찾았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해풍이 거셌다. 이 건물은 독일인 베버가 한 선교사의 발주를 받아 독일 건축 양식으로 1938년 완공했다. 그런데 1948년 남북이 38선을 기준으로 갈리면서 북한 땅이 되어 김일성 별장이 됐다. 그리고 6·25전쟁을 통해 수복되면서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의 공간이 됐다.

여기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화진포 일대는 사실 ‘화진포 선교유적지’라고 해야 맞다. 지리산 노고단·왕시루봉 선교 유적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셔우드 홀 (1893~1991)

‘화진포의 성’ 발주자는 1893년 서울 태생 셔우드 홀과 영국 출신 캐나다인 메리안 버텀리(1896~1991) 부부다. 셔우드는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부부의 장남이다. 로제타가 1890년, 윌리엄이 이듬해 조선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1892년 결혼했다. 윌리엄이 캐나다, 로제타가 미국인으로 선교 모임을 통해 알던 사이였다.

윌리엄은 1894년 평양선교기지 개척 책임자였다. 그해 청일전쟁 전쟁터 평양에서 많은 전염병 환자와 부상 군인을 치료하다 자신도 전염병으로 순직한다. 이듬해 로제타는 유복자 에디스 마거릿을 출산한다. 한데 안타깝게도 셔우드가 누구보다 예뻐했던 여동생 에디스마저 1898년 평양에서 감염병으로 죽고 만다.

어머니 로제타 홀을 모시고 기념 촬영한 셔우드 홀 부부.

유년의 셔우드는 질병과 전쟁, 아버지와 여동생의 죽음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와중에도 공부를 위해 조선을 떠나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생활했다. 남편 순직 후 일시 귀국했던 로제타는 뜻을 잇기 위해 1897년 다시 조선에 입국했다. 몇 달씩 걸리는 여정의 배 안에서 어린이들이 감염병에 걸렸고 셔우드와 에디스도 회복과 감염이 반복됐다.

1925년. 2세 셔우드 부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셔우드는 열아홉 살에 캐나다로 가 토론토의대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됐다. 아내가 된 메리안은 필라델피아여자의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노벨상 수상자 퀴리 부인이 조선행을 안타까워했을 정도다. 하지만 부부는 ‘세상 즐거움 버리고’ 이역만리에서의 복음 사역을 택했다.

해주 구세병원 관계자 등과 함께한 셔우드 홀(앞줄 왼쪽 네 번째).

셔우드 부부는 황해도 해주에 선교부를 구축하고 전도·의료·교육에 힘썼다. 무엇보다 폐결핵 등 전염병 예방을 위해 공중위생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환자들은 ‘신통력’에 놀라 구세병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전염병이 날로 퍼졌다. 다섯 명에 한 명이 결핵 환자였다. 부부는 격리 병동을 추진했다. 최초의 요양원이었다. 노턴 기념병원(해주구세병원)은 그렇게 설립됐다. “요양원에서 환자가 죽으면 폭동이 일어날 텐데요”라고 스태프가 염려했으나 부부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지요”라며 의지했다. 당시 로제타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사역하고 있었다.

셔우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 발행 사업을 펼쳤다.

1932년 12월 3일. 셔우드는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 위원회 회장을 맡아 마침내 조선 최초의 실을 발행했다. 배재학당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첫 구매자였다.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사람들은 도탄에 빠졌고 그럴수록 미신을 신봉했다. 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선교사에 대한 압박도 날로 심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수병(광견병)에 걸린 미친개가 메리안과 자녀, 동네 어린이를 물어 대혼란에 빠졌다. 백신이 부족했고 있다 하더라도 토끼 척추에 주사해 생성해야 하는 등 과정도 복잡했다. 주민들은 “선교사 집 개에서 시작된 미친 개 병”이라며 흥분했다. 셔우드는 이때의 심정을 ‘나는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그 힘을 베풀어 달라고 매달렸다’(셔우드 저 ‘조선회상’ 중)고 적었다. 부부는 개에 물린 지 14일 만에 죽는다는 공수병을 기적적으로 물리쳤고 탈진해 버렸다.

1984년 서울 양화진의 아버지와 여동생 묘역을 방문한 셔우드 부부.

부부는 안식을 위해 평안도와 함경도 선교사들의 안식처 원산을 찾았다. 당시 여름이면 선교사들은 수양회를 겸한 휴가를 비대면 지역에서 갖곤 했다. 서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 호남·경상도 선교사들은 지리산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원산 선교부 수양관 해안을 군사용 시설로 쓰겠다며 밀어버렸다. 그리고 내준 곳이 원산에서 160㎞ 지점 강원도 고성 화진포였다. 선교사들은 화진포 호수를 중심으로 5㎞ 반경 내에 안식처를 다시 지었다.

‘화진포의 성’ 계단. 김정일이 여동생과 사진 찍은 장소라고 표시돼 있다.

그때 셔우드는 ‘화진포의 성(城)’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부부는 수양시설을 지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독일인 베버에게 맡겨 놓고 해주 사역에 힘써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무렵 장티푸스 전염병이 심하게 돌아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 “용케 시간을 내어 ‘작은 오막살이 별장’을 보러 화진포에 갔다. …한마디로 경악 자체였다. 조그마한 막사가 아니라 그야말로 작은 성이었다.”(‘조선회상’) 셔우드는 아버지 순직 생명보험금을 기반으로 건축비용을 막았다. “그 성에서 몇 번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란 소용돌이로 곧 우리의 성마저 일제에 빼앗겼다.”

이승만 별장(위쪽)과 이기붕 별장. 1930년대 말 화진포 선교사 안식처를 활용한 별장이었다. 일제 강압으로 함남 원산 안식처가 폐쇄되자 이곳에 조성했다.

다시 ‘김일성 별장’. 김일성 아들 김정일은 유년기 이 성 계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일성 부모는 한때 기독교인이었다. 이승만·이기붕 부부는 또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있는 그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 화진포는 선교유적지다.

고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