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호구 되지 말기

국민일보

[여의도포럼] 호구 되지 말기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20-08-06 04:02

“더 이상 호구가 되고 싶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이다. 독일의 방위비 분담금 규모가 너무 작아서 미국이 호구가 된다는 의미다. 지난 6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한마디 없이 3만5000명 수준의 주독 미군에서 9500명을 빼겠다고 했다가 7월에는 1만2000명을 줄이겠다고 한술 더 떴다. 그중 6400명은 미국으로 복귀하지만 5400명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옮겨질 계획이다.

애초에 주독 미군은 독일이 원해서 독일 땅에 머물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등 사회주의권의 확장을 막기 위해 독일 땅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주독 미군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트럼프의 발표에 가장 반기는 나라가 러시아요, 애국심 많은 미국인은 아연실색하는 것이다. 이번에 미국은 유럽사령부 본부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벨기에로 옮기면서 주독 미군의 일부도 이에 따라 순환시키려고 계획한다. 전체적으로 주독 미군은 미국의 필요와 전략에 의해 배치 또는 재배치되고 규모가 정해지는 중이다.

미 언론은 주독 미군의 재배치가 완료되기까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고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한다. 공화당 소속인 상원 군사위원회 제임스 인호프 위원장도 국방부에서 관련 보고를 받고 이 작업에 몇 해가 걸린다고 확인했다. 이러한 계획은 사실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대통령 소속 정당인 공화당에서도 인기가 별로 높지 않다. 그래서 만일 11월 3일 열릴 미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수년이 걸리는 게 아니라 아예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주독 미군 감축은 한반도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간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4월 한·미 양국 실무진의 협상이 거의 끝나고 이제 양국 대통령이 결정할 단계라는 말이 나오자 주한 미군 사령관이 “김칫국을 마시다”라고 SNS에 글을 올렸던 지점에서 아직 변화가 없다. 우리 정부의 안은 첫해에 방위비 분담금을 13% 인상한 뒤 4년간 7~8% 인상하고 협상을 5년에 한 번 하자는 것이다. 이에 미국은 현재 약 10억 달러에서 5배인 50억 달러를 요구했다가 13억 달러 수준 인상과 매년 협상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주한 미군 ‘감축’이 아니라 ‘철수’가 임박했다는 유언비어가 시중에 떠도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2019년 말 국방수권법이 미국의 상하 양원을 통과해 2만8500명 미만으로는 주한 미군을 줄이는데 미국 예산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의회가 트럼프 대통령의 가벼운 언행과 돌발적 변심으로 주한 미군의 철수를 결정하지 못하게 막자는 의도다. 똑같이 올 4월에는 미국 의회에서 아예 위헌적 대북전쟁 금지법이 발의된 상태다.

혹자는 국방수권법에도 예외조항이 있어 상하 양원이 모두 주한 미군의 감축이 미국 국익에 필요하고 지역 내 동맹국의 안보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하면 허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주독 미군의 감축을 러시아가 가장 환영하듯이 주한 미군의 감축이나 철수에 가장 기뻐할 나라는 다름 아닌 중국이다. 주한 미군이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억지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도 크기 때문이다. 지난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도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다.

또 지금은 미국이 중국과 전방위적으로 충돌하는 데다 남중국해에서 무력충돌도 예상되는 때다. 이러한 상황에 주한 미군의 감축이 자국 국익에 부합하고 지역 내 안보를 보장한다고 믿을 인물이 미 의회에는 많지 않다. 실제로 하원의 아미 베라 동아태소위원장과 애덤 스미스 군사위원장은 이구동성으로 주한 미군이 국익에 중요하기 때문에 감축에 반대하고 있다. 기껏해야 2만8500명을 초과한 소규모의 주한 미군만 전 세계적인 순환배치에 따라 옮기는 방법만 남은 셈이다.

스티브 비건 국무부 부장관이 7월 한국에 와서 방위비 분담금을 첫해에 13.6% 인상, 유효기간 3년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일견 4월 실무 협의안의 절충안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 민주당은 정강·정책 초안에 트럼프식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갈취’라고 썼다. 갈취당하는 호구가 되지 말아야 하는 건 우리도 아닌가.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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