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틀에 박힌 사람

국민일보

[너섬情談] 틀에 박힌 사람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

입력 2020-08-12 04:07

사람들은 말을 걸지만 대상(隊商)은 지나갈 뿐이다.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이나 당당한 삶의 태도를 추켜올리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이 표현을 한 철학자는 어리석음을 표현하기 위해 썼다. 알랭 핑켈크로트의 에세이 ‘사랑의 지혜’에서 이 문장을 발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어리석음이란 이와 같이 외부의 어떤 말에 의해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방향을 바꾸는 일도 없이 침착하게 자기의 길을 가는 태도 속에서 발견된다.” 주어인 ‘어리석음’을 전혀 뜻이 다른 단어, 가령 의연함이나 당당함으로 바꿔도 말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다.

‘외부의 어떤 말에도 영향받지 않고, 방향을 바꾸는 일도 없이 침착하게 자기 길을 가는 태도’라니!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것이 어리석음을 설명하는 철학자의 표현이다. 이는 의연함이나 당당함, 심지어 숭고함조차 어리석음과 혼동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얼핏 보아 의연함이나 당당함, 숭고함으로 보이는 어떤 행동이 실은 어리석음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교만이 자부심과 혼동되고 겸손이 비굴함과 혼동되는 것처럼 어리석음은 의연함이나 당당함, 숭고함과 혼동된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간다는 자세는 숭고함이기도 하고 옹졸함이기도 하다.

핑켈크로트에 의하면 어리석음의 특징은 ‘틀에 박힘’이다. 그는 중세의 종교 교조주의와 근대의 이성과 과학 맹신 그리고 혁명을 앞세운 정치적 연설에서 똑같이 틀에 박힌 어리석음을 본다. 이 세 종류의 어리석음은 옷만 바꿔 입었을 뿐 틀에 박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서로는 서로를 적대시하지만 실은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이나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류이다. 자발적이지 않고 주어진 체제에 복종한다는 점에서 동류이다. 주인에게 복종하기 위해 손님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동류이다.

지식의 유무와 어리석음은 관련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틀에 박힌 사람이다. 철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어리석게 되지 않으려는’ 시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그는 자기 틀이 있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그 틀을 통해 이해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틀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틀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 틀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 틀을 의심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자기 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틀에 박혀 있다면 틀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다. 틀의 일부가 된 사람, 그래서 그 틀이 허용하지 않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틀에 잘 박힌 사람일수록 견고하고 확신에 차 보인다. 그러나 확신에 차서 하는 말들은 실은 그의 말이 아니다. 그가 박혀 있는 틀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틀에 박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틀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좀 더 교활하게는 착각하고 있다고 연기하면서)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당당하게 한다. 나쁜 일을 할 때도 당당하다. 그 당당함이 뻔뻔함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개의치 않는다. 자기가 하는 말이 독선이고 궤변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개의치 않는다. 시대의 변화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상황의 특별함에 대해 배려도 하지 않는다. 틀에 박힌 생각으로 판단하고 틀 안에 집어넣는다. 틀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사나워진다.

사람들은 말을 걸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듣지 않고 지나갈 뿐이다. 그 길이 아니라고 해도 듣지 않고, 다른 길로 가야 한다고 해도 듣지 않고, 같이 가자고 해도 듣지 않는다.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는 한 길은 하나뿐인데, 그 하나의 길은 자기가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에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이 없는 믿음은 맹신이고, 이는 어리석음이고, 그래서 위험하다.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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