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구 칼럼] 119원의 기적

국민일보

[김의구 칼럼] 119원의 기적

입력 2020-09-01 04:01

화재로 한계 몰린 피해자 돕기 인천 소방관 기부 캠페인 1년 만에 모금액 1억원 훌쩍 넘겨
무한 책임의식·공동체 정신 살아있다는 방증, 코로나19 위기 밝힌 한 줄기 빛과 같아


‘119원의 기적’은 인천소방본부가 지난해 8월 시작한 기부 캠페인이다. 한 사람이 하루 119원씩, 한 달에 3570원을 기부해 성금을 모아 불의의 화재나 사고로 곤경에 빠진 이웃들을 돕자는 취지다. 진화 작업을 끝내고 나서도 안타까운 사연에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겠더라는 동료들이 잇따르자 인천본부 서영재 소방위가 제안해 시작됐다.

지원 대상은 화재나 구급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접한 여러 사연 중 경제적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신청하면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소방관 등으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결정한다. 첫 지원은 발달장애인 생활공동체인 강화도 우리마을이었다. 지난해 10월 누전으로 불이 나 2층짜리 콩나물공장 건물이 전소되면서 장애인 50여명이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은 곳이었다.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던 소중한 장을 빼앗긴 이들은 성금 1000만원을 지원받게 되면서 시름을 덜고 웃음을 되찾았다.

인천 도림동 영구임대아파트 화재 피해자 유족들은 여섯 번째로 지원을 받았다. 심혈관질환을 앓던 지적장애인 오빠를 도우려 아파트를 찾았던 여동생이 지난 4월 화재로 함께 목숨을 잃었다. 오빠를 챙기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여동생은 밤에는 오빠를 돌보며 낮엔 남편과 아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었다.

인천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15곳의 한계 가정에 4609만원이 지원됐다. 한쪽 시력을 잃고 무릎이 아픈데도 청소 일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화마를 만나 노인복지관에서 생활하던 어르신, 암 치료 중인 어머니와 허리를 다친 부친을 모시고 살다 자신마저 산재를 당한 젊은이 등이다. 얼마 전엔 뇌출혈로 인한 오른쪽 마비에 심장 수술을 받은 70대 기초생활수급자가 남편까지 잃은 상황에서 구급차로 이송됐다가 의료비를 지원받기도 했다.

캠페인 시작 1년 만에 누적 모금액이 1억2800만원을 넘었다는 보도가 지난달 26일 나왔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시름이 깊어진 터에 마치 청량제를 마신 듯 시원한 기쁨을 선사했다. 소방관 2800여명에 기업 임직원과 시민 1100여명도 동참했다는 소식은 무더위도 잊게 했다. 1억원은 크지 않지만 한계상황으로 내몰린 가정들엔 요긴한 액수다.

지역소방본부에서 출범한 소액 기부 운동이지만 근저를 관통하는 것은 공동체 정신과 봉사 정신이다. 화재 현장에 뛰어드는 일만으로 벅찬 소방관들이 화재 이후 사각지대까지 배려하는 것은 단순한 직업정신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눈물겨운 숱한 사연을 퇴근과 함께 잊을 수도 있을 텐데 팔을 걷어붙이고 방법을 찾아낸 것은 공동체 의식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다. 캠페인 시작 한 달 만에 동참자가 이미 1000명을 넘어섰던 것은 119원으로도 꼭 필요한 곳에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도 훌륭했지만 이에 공감하는 능력을 우리 사회가 아직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육체와 정신이 지쳐가고 생활은 점점 더 삭막해져 간다. 하지만 선한 발상과 헌신적인 노력들은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큰불을 일으킨다. 우리 사회의 유대를 다져 팍팍한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공동체 DNA는 위기의 한가운데를 밝히는 한 줄기 빛과 같다.

의료계 사태를 지켜보노라면 119원의 기적과 전혀 다른 세상의 얘기 같다. 한쪽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이해의 충돌, 다른 쪽은 무한책임의식과 헌신이다. 어렵게 의대를 들어가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녔는데 정원을 늘리고 싼 학비로 지방의 의사를 양성하겠다는 정책이 공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게 젊은 의사들의 생각인 듯하다. 정책 추진 시기의 적절성이나 소통에 대한 불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 인력의 확충은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공정성의 문제는 정책 협의 과정에서 조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최근의 코로나19 재확산세는 의료인의 소명을 소홀히 하는 것을 허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의료계도 봉사나 헌신과 결코 먼 거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구·경북 코로나19 사태 때 의료진은 봉사를 자원해 위험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119원의 기적을 향한 찬사는 불과 수개월 전에는 의료계의 몫이었다. 갑갑한 방역복에 구슬땀을 쏟으며 버티다 탈진한 광경은 아직도 국민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