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위기의 한국 도와야 합니다”… 믿음의 자녀, 총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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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위기의 한국 도와야 합니다”… 믿음의 자녀, 총을 들다

선교사 자녀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와 서울 녹번동

입력 2020-09-1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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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평화공원의 쇼 대위 동상. 이 자리는 1950년 9월 ‘녹번리 전투’가 있었던 백련산 자락이다.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아들 쇼는 서울 탈환을 위해 진격하다 인민군 매복조 총탄에 숨졌다. 뒤로 보이는 교회는 1954년 설립된 은평감리교회다. 독립운동가 윤성렬 목사가 6·25전쟁 때 아들 윤대영을 금화고지 전투에서 잃고 설립한 기념교회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모일 수가 없었다. 교회는 문을 닫았고, 카페는 테이크아웃만 했다. 지난주 서울 은평구 역촌역 4번 출구 앞 은평평화공원. 6700㎡ 넓이의 소공원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오랜 만에 햇빛이 찬란한 날이었다.

그 공원 남쪽 끝에 제복 입은 군인 동상이 눈에 띈다. 동상 옆으로 기념비가 서 있다.

‘자기의 한국 친구들을 위하여 별세한 고 미국해군 대위 서위렴 2세 전사기념비(요 15:10).’

1939년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쇼(왼쪽)가 미국 유학에 앞서 아버지 서위렴과 찍은 사진.

서위렴 2세는 윌리엄 해밀턴 쇼(1922~1950)를 말한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얼 쇼(1890~1970·한국명 서위렴)는 미국북감리회 조선선교부 선교사로 일제강점기 주로 평양에서 사역했다. 쇼 대위는 1950년 9월 22일 미해병 1사단 5연대 정보장교로 서울탈환 작전을 수행하던 중 바로 이곳 녹번리에서 전사했다. 녹번리는 지금의 은평구 녹번·역촌·대조·응암동 일대다.

이 스물여덟 나이에 전사한 미군 장교의 고향은 평양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을 밟던 이 청년은 이렇게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

쇼 대위 부인 주아니타(앉은 사람)와 차남 스티븐 쇼 부부.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냈다. 장남 로빈슨은 서울대 초빙교수였다. 맨 왼쪽은 쇼가(家) 연구자 윤희중 목원대 명예교수.

‘저는 지금 한국이 위기상황에 놓여 있을 때 저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아니타(아내)와 저는 앞으로 한국에 가서 선교사로 봉사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데 지금 한국을 돕지 않고 기다리면서 대신 다른 사람들이 한국인을 위해 희생하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한 다음, 평화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 우리가 한국에 제일 먼저 달려간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아주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윤희중 목원대 교수 발굴 사료 중)

1930년대 쇼는 인천 송도에서 무의도를 헤엄쳐 건널 정도로 수영을 좋아했다. 현 무의감리교회.

쇼는 1950년 8월 2일 해군 대위로 재입대한다. 그는 1947~48년 신생 대한민국 해안경비대(해군 전신) 사관학교 교관으로 진해에서 근무한 바 있었다.

‘…지금 우리는 고향 땅 가까이에 있습니다. …호러스 언더우드(1917∼2004·원일한)와 저는 함대의 선단에 있으며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우리에게 미치도록 기도하는 일뿐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 주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평안을 주고 계십니다.’

그는 9월 14일 인천 앞바다 매킨리 함상에서 부모에게 이렇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자신이 어린 시절 인천 송도에서 4시간을 헤엄쳐서 건넜던 무의도가 보였다. 다음 날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된다.

옛 녹번리 일대는 현재 부유하고 평화롭다. 쇼가 전사한 냉정골(응암동 일대)은 흔적조차 없다. 70년 전 지형은 냉정골을 품었던 백련산(228m)과 불광천 정도다. 이 산과 내는 서울 서북부 시민에게 허파와 같은 산책코스다. 전쟁이 끝나고 도시로 몰려든 피난민과 이농민이 국유지 아무 데나 판잣집을 짓고 살아 1960~80년대 서민촌이었다. 이제 이곳은 두 코스의 지하철이 지나고 재개발되면서 활기가 넘친다. 전쟁 직후 이곳에 고아원과 천막교회를 지어 복음을 전했던 ‘할렐루야 아줌마’ 최자실(1915~1989) 목사가 “서대문에서 탄 버스가 고개 몇을 넘어 한참 가야 나오는 마을로 기와집 한두 채에 초가집 30여채가 모여 있는 작은 동네”라고 표현했던 곳이다.

쇼와 원일한 소속 미 5연대는 인천상륙 후 김포를 통해 한강 도하(개화산~행주산성 추정)에 성공, 서울 탈환을 목표로 진격했다. 지금의 연희동 능선에서 인민군을 격멸하고 안산~백련산 능선을 넘어 중앙청을 목표 삼았다. 원일한은 2대대, 쇼는 3대대였다. 3대대는 216고지(녹번리)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다. 한데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중대장 맥믈린은 측면 타격을 위해 매복자 색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쇼 대위를 순찰대에 포함했다. 쇼는 17세까지 평양외국인학교를 다녀 한국어가 모국어나 다름없었다. 쇼는 농부들에게 정보를 얻었다.

당시 냉정골은 깊은 산이었다. 숲이 우거져 푸른 빛을 내는 생골(生骨)이 많이 나온다 해서 녹번이고개였다. 순찰대가 그 고개를 앞서가고 본대가 뒤따를 때 매복 인민대 총구가 불을 뿜었다. 쇼가 고꾸라졌다. 2시간 동안 쌍방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미군은 일시 후퇴했고 전열을 가다듬어 6명의 해병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섰다. 부대가 쇼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의식이 없으나 숨은 붙어 있었다. 몸통에 몇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내장 파열이었다.

1956년 9월 22일 녹번리 전사지점서 치러진 쇼 부대 일행 전사비 제막식. 뒷모습이 쇼 대위 아버지 서위렴 선교사다. 이 비가 은평평화공원으로 이전됐다.

쇼의 전사 소식이 부산 미8군 군목으로 있던 서위렴 선교사에게 전달됐다. 서위렴은 한강이 보이는 김포공항 근처에 가매장된 아들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9·28 서울 수복 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아들을 묻었다. 6년 후 서위렴은 냉정골을 찾아 쇼 대위와 동료 3명의 전사 지점에 전사비를 세우고 예배를 올렸다. 그 비가 지금 은평평화공원 쇼의 동상 옆으로 옮겨진 것이다.

1957년 부활절에 헌당된 대전 목산 언덕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교회’.

쇼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서위렴 고향과 교회에서 기금이 모였다. 1957년 부활절, 대전 목산(현 목원대 부지) 언덕에 ‘해밀턴 쇼 기념예배당’이 준공됐다. 쇼가 재입대 직전 설교했던 매사추세츠의 한 작은 교회의 기부자 등과 토지를 희사한 한국인 등 5955명의 손길로 준공된 예배당이었다. 서위렴은 5955명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쇼 대위를 기리는 행사 등을 주관하는 해군중앙교회 김응진 장로가 기념비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것(기념예배당)은 우리 채플이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것(쇼의 죽음)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믿기 어려운 일이라서!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기뻐하실 것입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1922~1950) 연보

·1921~26년 아버지 서위렴 평양 광성학교 파송 (1941년까지 한국 사역)
·1922년 평양 출생
·1939년 평양외국인학교 졸업 및 미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입학
·1943년 해군사관학교 입교 및 영국해협 근무
·1945~46년 서위렴 필리핀 파송
·1947~48년 한국해안경비대 교관
·1950년 6월 매사추세츠 학생 목사
·1950년 8월 미 극동사령부 정보장교 파송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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