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추석 유감

국민일보

[청사초롱] 추석 유감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입력 2020-09-16 04:06

관습이란 개인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문화적인 인간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관계되는 것이다. 미개한 종족들에게는 종종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직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터부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금기가 목표하는 바는 분명히 지속적으로 관습을 인식하고, 드러나지 않는 강제성을, 즉 관습을 지키게 해서 의식에 각인되도록 하는 것이다(뤼디거 자프란스키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부분).

보름 후면 추석이다. 해마다 추석을 앞두고 경향 각처에 흩어져 살던 집안 형제들은 고향 선산에 모여 벌초를 한다. 조상들의 머리와 손, 발톱을 정성껏 깎아드리고 나서 큰절을 올린 뒤 읍내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으로 삼겹살 파티를 연다. 자의식 없이 이뤄지는 오랜 관습이다. 서울에 사는 나는 벌초를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부산을 떠는 일이 때로 귀찮고 성가시다. 하지만 벌초가 아니라면 산다는 핑계로 자꾸 미루게 되는 고향 방문이 어찌 가능할 수 있으며, 조상이 잠든 묘지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연례 행사처럼 치러야 하는 벌초 횟수도 점차 줄어들 게 분명하지 않은가. 어쩌면 벌초는 우리 대가 끝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묵은 관습이 될지도 모른다.

차 없이 사는 나는, 벌초하는 날에 맞춰 예매해 둔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올해도 열차편을 알아보고 있는데 집안 대소사를 도맡고 있는 6촌 동생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금년에는 코로나 관계로 부득불 벌초를 대행 업체에 맡기겠다는 내용이었다. 서운한 감정이 드는 한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같은 사정으로 손수 벌초를 못 하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다가올 추석 연휴에는 민족 대이동의 소란도 다소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로 인해 학수고대하던 자식들과의 상봉이 무산될 연로한 부모들의 상심을 떠올리자니 까닭 없이 감정이 매캐해지면서도 이제는 추석 명절의 오랜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추석은 음력 팔월 보름의 좋은 날이라는 뜻으로 중추절(仲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부른다.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있다. 5월은 농부들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땀 흘리면서도 등거리가 마를 날 없지만 8월은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된 때여서 봄철보다 힘이 덜 들고 신선처럼 지낼 수 있다는 말이니 그만큼 추석은 좋은 날이란 의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듯 추석은 연중 으뜸 명절이다. 그런데 과연 4대 명절의 하나로 꼽히는 추석이 민족 구성원 모두가 여전히 풍성하게 즐기는 으뜸 명절일까. 우리의 세시풍속은 농경의례로서 농사와 직결돼 있었다. 하지만 산업사회를 거쳐 디지털 문명 시대를 사는 요즈음에 들어서는 그 의미와 가치가 퇴색한 것이 사실이다. 과장을 실어 말한다면 ‘제2의 천성’(니체)으로 내면화돼 ‘이유도 없이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관습’으로서의 추석은 가족 간 우애로 시작해 반목과 갈등으로 끝나기도 하는 명절이 됐다.

“우리 가족은 카메라를 보고 있다/ 아니, 카메라가/ 초점에 잡히지 않는/ 우리 가족의 균열을 조심스레 엿보고 있다// 더디게 가는 시간에 지친 형들이/ 이러다 차 놓친다며/ 아우성이다 하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담장처럼/ 잠시 후엔 누가 붙잡지 않아도/ 제풀에 지쳐 제각각 흩어져 갈 것이다// 언제나 쫓기며 살아온 우리 가족/ 무엇이 그리 바쁘냐며/ 일부러 늑장을 부리시는/ 아버지의 그을린 얼굴 위로/ 플래시 터진다/….”(이창수 ‘가족사진’ 부분)

균열을 보이고 있는 가족은 우리들 보편적 세태가 아닐까? 습관처럼 명절 증후군을 입에 올리며 ‘드러나지 않은 강제성’을 감내해야 하는 일은 언제쯤이나 멈출 것인가?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