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토끼와 거북이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토끼와 거북이

배승민 의사·교수

입력 2020-09-18 04:05

시간을 들여 노력하지 않아도, 초심자의 운처럼 시작부터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는 일들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적당히 쳤던 피아노라든가 첫날부터 흉내를 그런대로 냈던 미술 등이 그렇다. 이러한 분야가 속칭 ‘토끼 스타일’의 영역인데, 사람에 따라 이런 토끼 영역이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를 돌아보면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토끼 영역에 대해서는 요행에 감사하며 넘어갈 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반면 초기에 성과가 잘 보이지 않는 ‘거북이 스타일’은 어릴 때부터 좌절을 많이 겪으며 마음의 상처를 받아온 경우가 많다. 특히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우리 문화에서 ‘거북이 스타일’이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부모는 타고난 ‘토끼 스타일’인데, 아이는 느긋한 시간이 필요한 ‘거북이 스타일’이라면?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어도 집안에 긴장의 분위기가 깔린다.

그런데 나이를 먹다보니, 토끼 영역이 많을수록 살기 편하고 인정받기 쉬웠던 삶의 패턴이 조금씩 달라져 가는 것이 보인다. 쉽게 내달린 뒤 누워서 쉬거나 게을렀던 시간들이 쌓인 그 미묘한 공백은, 처음에만 잘 보이지 않을 뿐 쌓이고 쌓여 결국 그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근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통 없다는 것이 콤플렉스였던 친구로부터, 그가 꾸준히 취미로 다져온 도자기로 만든 선물을 받았다. 가을볕에 반사되는 담백한 자태를 바라보자니 당장의 효과가 더뎌도 긴 시간 유지했던 취미의 산물은 참으로 매력 가득했다. 초기에 잠시 반짝하고 지나가는, 풋내 나는 즐거움도 좋겠지만, 소중한 시간의 의미가 덧입혀진 은근한 애정의 상징들과 함께하는 것도 단조로운 삶에 다양한 기쁨을 준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전례 없는 속도와 방향으로 달려온 한 해를 정산하는 가을이 왔다. 이 가을, 쌓인 시간을 여기까지 헤쳐 온 스스로와 서로를 도닥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배승민 의사·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