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코로나 시대의 작별

국민일보

[혜윰노트] 코로나 시대의 작별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입력 2020-09-18 04:02

며칠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지난 몇 달간 노환으로 병원에 누워 계셨다. 입원 초기에는 드문드문 찾아뵙기도 했는데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면회조차 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당신께서는 다섯 명의 자식과 그 배우자, 열 명의 손주까지 스무 명의 일가를 이루시고도 몇 달을 한 폭 병상에 홀로 누워 계셔야 했다.

병원 분들의 조력으로 이따금 영상통화를 하기도 했지만 병환으로 혼몽하신 가운데 할아버지가 상황을 얼마나 납득하셨을지 모르겠다. 사람이란 무릇 몸이 성하고 정신이 명료한 가운데에도 불가해한 고독을 느끼곤 하는데. 나는 아프신 할아버지가 느끼고 계실 고립감을 상상하면 슬퍼지곤 했다. 코로나 시대의 비극은 멀리 있지 않았다.

병환이 위중해지고 있다는 소식도 의료진을 통해서만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나마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다소 완화돼 읍소 끝에 몇몇 가족은 간신히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셨다고 한다. 대화와 온기를 나눌 수 있을 때 작별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자손들이 모여 슬퍼하고 있음을 영혼으로 느끼셨을 거라고 믿어본다. 우주가 내게 죽음이라는 초월적 사태를 제시했으니 나 역시 논리를 뛰어넘는 소망을 품어도 이해해주리라.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가족장이라고 해서 다른 방식이 있는 줄 알았더니 빈소와 절차 등 모든 것이 일반 장례와 같고 단지 조문만 받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를 낀 가족들이 장례식장에 모여 사흘을 보냈다. 안 그래도 유전자를 나눠 엇비슷한 사람들이 같은 차림에 얼굴마저 가리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가 혼동돼 눈매를 유심히 살펴야 했다. 모두 건물을 오갈 때마다 체온을 재고 수시로 손을 씻었다. 쌀밥에 된장국, 수육 같은 상갓집 음식들이 갖춰져 있었으나 되도록이면 모여 앉아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식장의 벽에는 마주보고 밥 먹지 말고, 서로 손을 잡는 대신 목례로 슬픔을 나누라는 안내문들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입관을 할 때도 우리는 마스크 아래 흐느꼈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의 명절 때 할아버지를 뵙고 인사를 나누며 손을 잡곤 했다. 이제는 차갑게 식어 삼베에 단단히 싸매진 뭉뚝한 손을 살며시 쓰다듬어 보았다. 생전의 음성, 표정, 걸음걸이, 즐겨 쓰시던 모자, 그리고 따듯한 손이 떠올랐다. 나의 친한 친구도 몇 해 전 조부상을 당했다. 친구의 가족은 고인께서 생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셔서 관에 CD 몇 장을 넣어드렸다고 한다. 내 할아버지는 무엇을 가장 가져가고 싶으셨을까. 나는 당신께서 뭘 좋아하셨는지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에 발인이 있었다. 두어 시간 버스를 타고 달려 할머니가 묻히신 산으로 갔다. 운구는 손주들이 맡기로 했고 나도 관의 한쪽을 잡았다. 평소 그다지 해드린 것도 없는데 마지막으로 쉬러 가시는 길이라도 도와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이야 코로나 여파로 쉬고 있지만 나름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해온 손녀의 씩씩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기도 했다. 검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작은 산을 얼마간 올라 할아버지를 모셨다. 할아버지와 함께 걷는 마지막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먼저 쉬고 계신 할머니 곁에 묻히셨다.

봉분이 만들어지는 와중 비가 쏟아졌다. 갓 파헤쳐진 붉은 땅에서 흙냄새가 진하게 피어오르고 짙은 흙탕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우리는 빗줄기 아래 제를 지냈다. 줄이어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모두의 손과 발이 붉게 물들었다. 죽음이 일상적인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렇게 서로 손을 마주 잡을 수도 없고, 크게 입 벌려 울 수도 없고, 음복조차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이뤄지는 장례라니,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생전 술을 거의 드시지 않았다. 평생 드신 술잔보다 오늘 받으신 술잔이 많을 것 같았다. “아버님이 취하셨겠어요.” 누군가의 말에 모두 젖은 눈썹으로 축축한 마스크 아래 조금 웃었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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