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한국판 ‘아무도 모른다’

국민일보

[돋을새김] 한국판 ‘아무도 모른다’

신창호 사회2부장

입력 2020-09-22 04:02

2004년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네 명의 버려진 아이가 나온다. 열두 살의 장남 아키라는 두 살 아래 여동생 교코, 다섯 살 아래 남동생 시게루, 갓 네 살이 된 막내 유키와 빈민가 작은 집에서 떠나버린 엄마를 기다린다. 외간남자와 바람이 난 엄마는 오지 않는다. 그사이 아키라는 살아야만 했다. 편의점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 김밥을 주어 와 동생들에게 먹인다. 어디에 가면 땔감이 있는지, 어디에 가면 ‘쓸 만한’ 버려진 옷이 있는지 훤히 꿰고 있다.

어느 날 막내 유키가 담벼락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다. 아이들은 유키가 좋아하던 초콜릿을 사다 먹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해줄 게 없었다. 그들이 죽어갈 동안 어른들은 아무도 몰랐다. 엄마는 알면서도 그들을 버렸고, 세상은 네 아이의 불행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관청과 공무원들은 지극히 ‘행정적’인 관심만 보였을 뿐이다.

1주일 전쯤 인천 미추홀구 주택가 한 빌라에서 화재가 나 어린 소년 형제가 중화상을 입었다. 엄마가 나간 사이 배가 고파 라면을 끓이려다 불이 난 것이다. 화재 사고가 난 뒤 두 소년이 ‘어린이 가장’ 수준으로 삶을 헤쳐온 사실이 하나씩 드러났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엄마, 극빈 가정에 지원되는 바우처를 들고 동네 편의점에서 능숙하게 장을 보는 아이들의 CCTV 영상, 불이 나자 동생을 안고 화마를 온몸으로 받아낸 형….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등교를 하지 못한 형제는 자그만 빌라에서 스스로 삶을 헤쳐나가야 했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으로 매달 160만원가량의 돈이 엄마에게 주어졌지만, 두 아이에게 필요한 건 돈만이 아니었다. 또래들이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옷조차 잘 못 입을 나이에 형제는 라면을 끓이고, 장을 봐야 하루를 살 수 있었다. 동네 편의점 주인은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영특하게 꼭 필요한 것들만 살 줄 알더라”고 했다.

빌라가 잿더미로 변할 때까지 아무도 ‘라면 형제’를 몰랐다. 두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기초생활수급 대상 가정을 관리하는 미추홀구 용현동 주민센터도, 사회복지센터도 형제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않았다. 화재 당시 외지 여행 중이던 엄마가 몇 년 전에도 아동학대 혐의로 수사기관 조사를 받았음에도 담당 관청들의 관심은 영화처럼 ‘행정적’일 뿐이었다. 지원금을 지급하고, 학교 잘 다니느냐고 부모에게 묻는 게 다였을 것이다.

두 아이의 비극은 대한민국에서 매년 수만건씩 발생하는 아동학대·방치 사건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부모란 이름으로 자식을 극한의 삶으로 몰아내는데도 우리 사회는 지극히 순진한 온정주의에만 빠져 있다. “부모니까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친자식인데 남보다 잘 키우겠지” 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애어른’이 되고 목숨을 빼앗기기까지 한다.

선진국에선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 때도 부모가 지켜봐야 하고, 그 자리를 떠난 부모는 처벌을 받는 게 상식이다. 그 상식을 지키지 않는 부모에게선 양육의 권리를 빼앗는 게 또 다른 상식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라면 형제’의 비극이 터지자 곳곳에서 온정이 답지하고 있다. 벌써 모금된 금액이 수천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라틴어 경구엔 ‘포스트 페스툼(Post Festum)’이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 ‘북 다 치고 난 뒤’란 뜻이다. 비극이 터진 뒤 찾아가 위로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 비극이 터지지 않게 하는 방법, 그걸 찾는 게 나은 일이다. 사경을 헤매는 라면 형제에게 수천만원의 돈은 양심에 찔린 어른들이 찾은 위안거리에 불과하다.

신창호 사회2부장 procol@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