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파리 시내 당당하게 걷기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파리 시내 당당하게 걷기

이원하 시인

입력 2020-09-23 04:05

나는 가끔 나를 비웃기 위해 허공에다가 무섭다고 외친다. 무섭다고 외치는 내 모습은 어이가 없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음식을 주문했을 때, 자취를 시작했을 때, 어두운 밤거리를 혼자 걸었을 때마다 무서운 감정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서운 게 없다. 내가 강해져서 그런 게 아니라 무섭다고 느끼는 감정이 공상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유럽 여행이 간절해서 친구를 설득시켰었다. 혼자 떠나버릴 자신이 없어서 함께 떠나자고 조른 것이었는데 같이 가겠다던 친구는 그날 이후로 나를 피해 다녔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포기하려고 했다. 혼자 떠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고 부끄러웠다. 이런 모습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었다.

프랑스 파리행 왕복 티켓이 단돈 50만원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영영 프랑스에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티켓을 구매했고, 그대로 바로 출발했다.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샤를드골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고, 시내에서 숙소까지 꽤 오랜 시간을 혼자 걸었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낮에 자다가 어두운 밤에 길거리를 나섰을 때도 무사했다. 혼자인 나를 노리는 사람은 없었다. 여태껏 별거 아닌 일을 왜 이렇게 두려워했던 것인지 의문이었다. 보름간의 여행을 혼자서 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이제 세계 어느 나라든 혼자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말보다 몸을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됐다. 세상에는 막상 저질러보면 별거 아닌 일투성이다. 제주도 정착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만류에 겁먹지 않고 떠났더니, 꿈에 그리던 시인이 돼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안다. 당당하게 걷는 사람에게 공포심은 끼어들지 못하고, 실패 또한 끼어들지 못한다는 것을.

이원하 시인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