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좋은 삶을 산다는 것

국민일보

[너섬情談] 좋은 삶을 산다는 것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입력 2020-09-23 04:02

주말에 어머니 집을 찾았다. 문을 여니 일회용 마스크 귀고리를 가위로 자르는 중이셨다.

“뭐 하세요?”

“마스크를 버릴 때, 귀고리를 일일이 잘라야 한다더라. 그냥 버리면 안 된대. 혹여 바람에 날려 가면 새 다리에 걸리는 올무가 되거나, 물에 들어가면 물고기 몸통을 감아 헤엄을 못 치게 한다더라. 조금만 내가 귀찮으면 되는데, 멀쩡한 목숨을 빼앗는 몹쓸 짓을 하면 되겠니.”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 평생을 좇아도 어머니를 못 따르는구나 싶었다. 관련 소식을 방송에서 접하신 모양이다. 며칠 전 나 역시 한 시민단체에서 소셜미디어에 올려둔 카드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설마 하는 알량한 지레짐작 탓인지 무심히 지나친 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창피한 일이다.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늘 비슷한 길로 이어지는 듯하다. ‘크게 생각하고 작게 행동하는 것’이다. ‘멀리까지 내다보고 가까이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신을 바라보듯이 이웃을 대하는 것’이다. 아니, 이 말들은 뒤집어 말하는 게 더 옳다. 평소에 무심히 하는 행동에 지구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는 것이 좋은 삶이다. 오늘 내가 하는 이 일이 다음에 올 아이들한테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조심하는 것이 좋은 삶이다.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신의 얼굴을 본 듯이 공경하는 마음을 쓰는 것이 좋은 삶이다.

얼마 전 어머니가 양념게장을 만들어 보내신 일이 떠올랐다.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둘러앉아 정신없이 먹다가 문득 살펴보니, 게 다리에 붙은 뾰족 돌기를 일일이 잘라내고 살이 빠지기 좋게 세로로 하나하나 가위질을 해 두셨다. 나이든 몸으로 하루 종일 힘들게 일을 치렀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했다. “어머니, 대충대충 하세요. 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아요.” 전화해서 일부러 퉁명스럽게 굴었다. “어떻게 그러니, 사람이 먹을 건데.” 먹다가 혹여 입천장을 다치지 않게, 먹는 사람이 편하게 남김없이 먹으라고 당신의 손끝은 수없이 가시에 찔렸을 것이다. “너네들, 맛있게 먹었으면 되었다. 끊어라.”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 윤리의 기초를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당신이 나와 절대적인 그 사이에 끼어든다. 그것이 타자의 얼굴이다.” ‘나’와 ‘신’ 사이에 ‘너’가 있다. 인간은 끝없이 신에게 가 닿고자 하지만 결코 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 신은 항상 손님의 형태로만, 즉 너의 얼굴, 표정, 몸짓을 통해서만 나에게로 다가온다. 신을 공경하는 것은 ‘당신’에 대한 행위를 통해서만 간신히 가능하다. 당신이 나의 존재를 기뻐하면, 신이 춤을 추는 것이다. 당신이 나의 존재를 슬퍼하면, 신이 우는 것이다. 당신이 나의 존재를 싫어하면, 신이 찡그리는 것이다. 따라서 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을 때에는 이웃의 얼굴을 보면 된다. 신은 이웃을 통해서만 나에게 현현한다.

한마디로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하듯이 못쓰게 살지 말고, 내 행동이 어딘가, 누군가한테 몹쓸 짓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기쁨으로 이어지도록 정성을 들이는 일이다. 누군가 하루 일상을 이러한 마음으로 행했다면, 그날은 신과 함께 하루를 산 것이나 다름없다. 타자의 얼굴이 곧 신의 얼굴이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한순간 한순간 성의를 다하면서 살아오셨다. 그러고 보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아주 어렵지만은 않다. 음식을 만들 때 먹는 사람 얼굴을 떠올리고, 마스크를 버릴 때 새나 물고기를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 역시 책을 만들 때에는 독자들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대화하듯 일을 치르곤 한다. 너의 얼굴과 함께 행하는 일들의 목록을 늘려서 일상 전체를 채우는 일, 이것이 좋은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다. 어떻게 해야 이 비결이 몸에 완전히 붙을 수 있을까. 게 다리를 쪽쪽 빨면서 생각한다. 살이 참 달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