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공갈협박범의 역설

국민일보

[데스크시각] 공갈협박범의 역설

한장희 산업부장

입력 2020-09-24 04:02

A와 B에게 C가 제안한다. “1시간 안에 둘이 어떻게 나눌지 합의하면 10억원을 다 주고, 합의를 못하면 한 푼도 없다.” 반씩 나누자고 A가 제안하자 B는 자신이 9억원을 갖겠다고 한다. “난 한 푼 못 챙겨도 아쉬울 게 없으니 잘 생각하라”던 B는 30분이 지나자 자기 몫을 9억5000만원으로 늘리겠다고 오히려 으름장을 놓는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아우만 교수의 게임이론인 ‘공갈협박범의 역설(The Blackmailer’s Paradox)’ 중 일부를 각색해봤다. 얼핏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현실에는 수많은 B가 존재한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아니면 말고’ 또는 ‘배째라’식 협상의 달인이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의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는 방위비 분담금으로 1조원 정도를 내던 우리나라에 주한미군 철수카드를 들이대며 약 6조원(50억 달러)을 부담하라고 압박했다. 터무니없는 조건을 받을 수도 없지만 잃을 게 더 많은 우리 정부는 난감한 입장이다.

이처럼 게임이론의 영역에서 정의란 없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협박하는 측이 대개 큰 이익을 얻고, 절실한 측은 협상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게 이론의 핵심이다. B와 트럼프의 ‘날강도’식 제안도 어떻게 보면 상대의 절실함을 이용한 전략, 즉 이렇게 나와도 상대가 판을 깨지 못할 것이라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익 관철에 극단성을 드러내는 비이성적 상대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게임이론은 ‘비합리적으로 맞서라’고 권한다. 비합리적인 상대에게 비합리적으로 맞서는 게 때로는 합리적일 수 있다는 논리다. A가 “1억원이라도 챙기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과감히 버리고, “나도 필요 없어”라고 배짱을 부리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한판으로 끝나지 않는 게임이라면 이 방식은 종종 먹힌다고 했다.

산업계엔 최근 굵직한 협상 여러 건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스타항공에 이어 아시아나항공 매각은 ‘노딜’로 끝났다. 코로나19로 급변한 영업환경 탓에 협상은 시작도 전에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주항공과 HDC현대산업개발은 좀 더 유리한 매입 조건이 아닌 최대한 덜 욕먹고 계약금을 돌려받겠다는 전략으로 나섰기 때문에 협상에 게임이론이 작동할 여지도 없었다.

반면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 관련 협상은 게임이론으로 무장한 양측이 제대로 맞붙은 형국이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최종 선고를 앞두고 SK이노베이션은 예비판결에서 승기를 잡은 LG화학을 상대로 협상을 시도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양사가 제시한 합의금 차가 조 단위를 훌쩍 넘었다는 전언이다. 여전히 양측은 ‘영업비밀을 침해한 근거를 내놔라’ ‘삭제된 문서가 기술유출의 증거’라며 모호한 주장으로 장외 공방을 벌이고 있다.

우리 기업 간 싸움으로 중국 일본 등의 어부지리 우려가 나와도 그뿐이었다. 정부가 조정의 장을 만들려고 해도 양사는 주주들의 ‘배임’ 문제 제기를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관전자 입장에서 보면 사실 걱정스럽기 그지 없다. 테슬라 폭스바겐 등이 자체 배터리 생산에 골몰하고 있는 이때 양사는 이미 수천억원을 챙긴 양측 변호인들의 “불리할 게 없다”는 말만 믿고 기약없는 전쟁을 이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마저 생긴다.

개인적으론 양사에 이번 게임만은 ‘합리적으로 임하라’고 권하고 싶다. 공갈협박범의 역설이 언제나 통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치킨게임이 한국 2차전지산업의 추락으로 이어진다면 협상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SK, 소송을 제기한 LG, 조정에 미적댔던 정부 모두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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