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독감 백신 저가입찰

국민일보

[한마당] 독감 백신 저가입찰

라동철 논설위원

입력 2020-09-24 04:05

중소기업에 거래처인 대기업은 그야말로 ‘갑’이다. 밉보였다가는 납품이나 하청에서 배제돼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내몰릴 수 있다. 대기업이 부당한 요구를 해도 어지간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기업의 갑질 가운데 대표적인 게 단가 후려치기다. 심할 경우에는 원가에도 못 미치는 단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부당한 단가 인하가 누적되면 중소기업은 골병이 들기 마련이다. 남는 게 별로 없으니 직원들 임금 올려주기도 벅차고, 기술 개발에 투자할 여력을 갖추기도 어렵다. 파장은 개별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 전체로 보면 중소기업들의 기술 개발이 정체·퇴보하고 대기업도 중소기업 몫을 빼앗아 이윤을 늘리는 데 안주해 국제적으로 기술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중소기업도 저가 납품에 따른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저가 원료를 쓰게 되고 부실 시공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확대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당한 단가 인하 요구를 불공정 거래 행위로 규정해 단속하는 것은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다.

단가 후려치기는 민간 기업만의 행태가 아닌 것 같다. 최근 벌어진 사상 초유의 독감 백신 접종 중단 사태는 정부의 저가입찰이 부른 예견된 사태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질병관리청이 무료 접종할 독감 백신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저가입찰을 고집한 게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백신 제조 업체들은 이번 4가 백신의 조달가격이 도스당 8740원인데 시중 판매 가격의 60%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납품할수록 손해를 보게 돼 여러 차례 유찰됐고 납품 시한에 쫓기다보니 관리가 소홀해 백신의 상온 노출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논리적 비약일 수도 있지만 입찰이 네 차례나 유찰된 것을 보면 단가 후려치가 아니냐는 지적이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는다. 이익을 늘리자고 납품단가 인하를 강요하는 대기업과 오십보백보다. 민간에 공정거래 준수를 요구하려면 정부부터 솔선수범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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