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언어 민족주의

국민일보

[한마당] 언어 민족주의

천지우 논설위원

입력 2020-10-12 04:04

매년 한글날마다 나오는 목소리 가운데 일본제 한자어, 일본식 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하자는 주장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다. 전국국공립유치원교사노조는 ‘유치원’을 ‘유아학교’로 바꾸자고 정부에 촉구했고, 광복회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이들은 “유치원은 ‘어린이들의 동산’이라는 뜻의 일본식 조어법을 따른 한자어”라며 “한자문화권에서 유아 교육기관에 이 명칭을 사용하는 곳은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라고 지적했다. 경기도의회 친일잔재청산특별위원회는 공공기관부터 일본어투 용어 사용을 자제하자며 ‘간담회’를 ‘정담회’나 ‘대화모임’으로, ‘가건물’을 ‘임시건물’로, ‘순번’을 ‘차례’로 순화할 것을 권고했다.

순화란 잡스러운 것을 걸러서 순수하게 한다는 뜻이고, 그 잡스러운 대상이 일본식 표현이니 이런 주장을 언어 순수주의, 언어 민족주의로 볼 수 있겠다.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는 것은 필요하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무조건 배척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에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너무나 많아 이를 다 피하면서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 사회 경제 문화 혁명 헌법 공화국 회사 방송 등 일반적인 용어부터 ~적(的), ~제(制), ~력(力), ~주의(主義)와 같은 조어법까지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도 일본식 용어 청산 주장이 계속 나오는 것은 뿌리 깊은 반일민족주의와 순수한 우리 것을 찾으려는 열망 때문으로 보인다. 유치원 명칭 개정을 촉구하는 단체는 개정을 통해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신을 되찾자고 했다. 하지만 유치원이란 단어를 사용해온 것 때문에 우리가 민족정신을 잃었는지, 유아학교로 바꿈으로써 민족정신이 생기는지 잘 모르겠다. 간담회를 굳이 비슷한 한자어인 정담회나 대화모임이라는 어색한 조어로 바꿔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간지(느낌), 야지(야유·놀림), 겐세이(견제) 같은 일본어의 무분별한 사용을 자제하자는 요구면 충분하지 않을까.

천지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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