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구 칼럼] “사랑하는 남녘 동포”

국민일보

[김의구 칼럼] “사랑하는 남녘 동포”

입력 2020-10-13 04:01

노동당 창건 75주년 연설에 나타난 정상국가 향한 의지

남한에 유화 메시지 보냈지만 서해 피격 사건 진상 조사에 응하고 공동수색 결단해야

진정성 있더라도 실천 없으면 그들만의 정상국가일 뿐

지난 10일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행사는 여러모로 눈길을 끌었다. 초유의 심야 열병식이나 신형 대량살상무기 시위도 있었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긴 연설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인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의 당위성을 강조함으로써 정상국가를 지향하는 의지를 피력했다.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인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언급도 했다. ‘무오류의 수령’이라는 기존 도식과 달리 울먹이는 감정 표현까지 여러 차례 섞었다.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이 마음을 정히 보낸다”는 대목도 포함돼 남쪽에 유화적인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연설 전문을 훑어보면 내용은 노동당과 북한 사회가 현재에 이르게 된 역정과 성과를 평가하고 그 공이 인민에게 있음을 치하하는 게 핵심이다. 특히 코로나19와 연이은 태풍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북한 주민의 노고에 감사를 표시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는 전 세계에 보낸 코로나19 위로 메시지 중 일부다. “하루빨리 이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 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는 구절은 남북 협력에 대한 의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남과 북이 그간 두 손을 맞잡지 못한 게 코로나19 때문이고, 이 상황이 지나면 곧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자의적이다. 북한의 여러 적대 행위, 핵과 미사일 증강을 국제관계의 기본 토대로 설정하는 도발적인 정책이 남북 및 국제 관계 갈등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녘 동포’ 구절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 건 지난달 25일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서해상 피격 사건과 관련해 북한이 보내온 통지문 때문이다. 사건 발생 사흘 만에 우리 정부에 전달된 통지문에서 김 위원장은 “가뜩이나 악성 비루스 병마 위협으로 신고하고 있는 남녘 동포들에게 도움은커녕 뜻밖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커다란 실망감을 더해준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입을 빌린 간접화법이긴 했지만 북한 최고지도자의 신속한 공개 사과라는 점에서 파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상에서 단속 취급 전 과정을 수록하는 체계를 세우라고 지시했다”는 구절도 담겼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인민군 초병의 총격으로 사망했을 때 북한은 사고 다음 날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대변인 명의로 유감을 표명했다. 출범 6개월째였던 당시 이명박정부는 관광 잠정 중단 조치를 취한 뒤 당국 간 협의를 통해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한 뒤 관광을 재개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박씨가 군 경계 지역에 들어간 사실을 언급하며 사고 책임이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고 강변하며 오히려 역으로 사과를 요구했다. 현장 조사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금강산 관광은 재개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남북 관계가 경색이 이어졌다.

이번 사건에도 북한은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 조사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어 북측이 설명한 사건 경위에 대한 의문점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시신 수습을 위한 공동 수색도 이뤄지지 않아 유족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국민 분노가 잦아들지 않고 있다.

북한은 공무원 시신 송환과 사고 발생 경위에 대한 객관적 조사, 이에 따른 합리적 후속 조치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역지사지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국민이 총에 맞아 숨지면 그 경위를 규명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다. 시신 송환도 정부가 전력을 다해야 할 부분이다. 북한이 남쪽의 형편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고 무시한다면 정상국가 선언은 그들만의 것일 뿐 책임 있는 국제사회 일원이라 평가하기 어렵다. 김 위원장의 이례적인 빠른 사과, ‘사랑하는 남녘 동포’를 언급한 연설에 진심이 담겼다면 과감하고 진일보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상국가를 지향하는 의지에 진정성이 있더라도 표현되고 실행되지 않으면 상황을 타개하는 추동력이 될 수 없다. 이대로 세월이 흐르면 사건에 대한 기억은 흐려질 수 있지만 북한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기는 어렵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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