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의 문화스케치] 호시절

국민일보

[오은의 문화스케치] 호시절

입력 2020-10-17 04:04

얼마 전부터 TBS의 TV 프로그램 ‘그대에게’를 진행하고 있다. ‘그대에게’는 공연 프로그램으로 ‘힐링 스테이지’라는 부제처럼 시청자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무대를 지향하고 있다. 첫 회 게스트로 이은미씨가, 2회 게스트로 여행스케치가 출연했다. 코로나19 시대에도, 아니 코로나19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더욱 위로가 절실하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힘내”라는 말이나 등을 토닥이는 행위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모두 몹시 지쳐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생활의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생활의 불편함은 일차적으로 불편을 일으키는 요소를 제거할 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시절이 되고, 시절이 다시 시대가 되는 동안 우리의 몸집뿐 아니라 마음의 집이 작아진 것도 사실이다. 낙담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무기력이 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집에서부터 영화관까지의 물리적 거리보다 마음으로부터 영화 감상까지의 심리적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된다. 삶이 팍팍해지고 각박해진다. 평소에 누리던 것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심신이 굳어간다. 영화관에 갈 수는 없지만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를 본다. 공연장에 갈 수는 없지만 유튜브를 통해 공연 영상을 본다. 분명 보고 즐기는 것은 나인데, 마치 대리만족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이것마저 포기하면 삶의 생기가 모조리 사라질 것만 같다. ‘마지못하다’라는 단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다. 영화를 볼지 말지, 공연장에 갈지 말지 결정할 수 있었던 1년 전이 호시절 같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으로 우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삶의 많은 순간은 다른 것에 의해 무늬가 새겨진다. 친구와 대화하고 공원을 산책하고 고대하던 공연을 현장에서 보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크게는 ‘문화’가, 작게는 ‘문화 콘텐츠’라고 불리는 것이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그것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계가 몹시 그립다.

‘그대에게’에서 나의 역할은 MC 테이를 도와 출연자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공연 현장을 최대한 생생히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일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함께할 수 없기에 방송국에서는 ‘미디어 월’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녹화 방송이지만 미리 신청을 받은 사람들에 한해서 현장의 생생함을 함께 나누는 장치인 셈이다. 온라인 방청객들은 해당 뮤지션에게 보내는 응원의 말을 적어 화면 위로 띄운다. 스케치북 위에 메시지를 쓰는 사람도 있고, 스마트폰 화면 위로 글자들을 흐르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미디어를 활용하든 진심은 늘 백발백중이다. 그 글귀들을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출연자뿐 아니라 나까지 감정이 뜨거워진다.

여행스케치는 마지막 무대에서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라는 노래를 불렀다. 경쾌한 노래인데도 듣고 있자니 묘하게 차분해졌다.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노랫말 덕분이었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큰 요즘이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그저 우리 몫을 다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상황이 같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불편을 안고 산다는 점은 똑같다.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말은, 막막함이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위로를 선사한다.

지금을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불확실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요즘이다. 여러 제약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애써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예전이 호시절이었지”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는 사람에게 이런 시절에도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을 함께 찾아보자고 손 내밀고 싶다. 많은 불편과 불안과 불쾌 속에서 편안함과 쾌활함이 깃들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대’라는 말은 상대편을 친근하게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이자 개인적인 애틋함을 담아 조심스럽게 건네는 표현이기도 하다. ‘자기’보다는 정중하고 ‘당신’보다는 가깝게 느껴지는 단어가 바로 그대다. 잘 사는지 궁금해 자꾸 떠올리고 마음 건넬 수 있는 그대들을 헤아려보고 있자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호시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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