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사랑을 너에게서 배웠는데

국민일보

[혜윰노트] 사랑을 너에게서 배웠는데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입력 2020-10-16 04:06

아침에 일어나 다시 한번 ‘야생 붓꽃’을 읽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시다. 미국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의 수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에는 번역본이 한 권도 없었다. 노벨 문학상이 발표된 날 한밤중에 ‘야생 붓꽃’이 번역되어 내 손에 들어왔다.

“망각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되돌아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내 삶의 중심에서부터 푸른 바닷물에 얹힌 심청색 그림자들,/ 거대한 샘물이 솟았지요.” 시의 마지막 연을 소리 내 읽어보았다. “내 고통의 끝에 문이 있었어요”로 시작하는 시에는 죽음과 상실, 치유와 회복의 체험이 표현돼 있었다.

시인의 문학상 수상을 특히 기뻐한 것은 내 이웃과 적어도 한 번쯤 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뉴스가 됐으니 시를 화제로 삼아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시, 문학적인 대화, 오랜만에 계절의 선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루이즈 글릭의 삶은 꽤 슬프고도 강인했다. 몸이 아파서 제대로 학교 수업을 받지 못한 시절도 있었고, 복잡한 가족 관계로 삐걱대느라 정신을 놓는 날도 많았다고 한다. 그 아픔을 치유한 것이 시가 아닐까 짐작했다.

이 짐작을 믿음으로 바꾸는 데에는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막 출간된, 고 허수경 시인의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를 이어서 읽었기 때문이다. 2년 전 독일 뮌스터에서 세상을 떠난 허 시인이 사랑한 시 50편을 모은 책에는 시가 가진 치유력, 서늘한 공감이 절절하게 엮여 있었다.

“처음 시라는 것을 썼을 때 가난, 막막한 불안, 정치적인 굴곡 등을 주제로 했었지요. 그때 시를 쓴다는 것, 시를 읽는다는 것은 큰 용기와 위안을 주었어요. 몇 개의 문장으로 어떤 아우라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신기함! 초라한 삶에 다가오는 아름다움 앞에서 절감하는 즐거움!” 허 시인이 쓴 신기함과 즐거움이란 단어에 느낌표가 붙어 있다. 그렇다, 시라는 것은 이렇게 신기하고 즐거운 물건인 것이다! 즐겁게 갖고 놀 수 있고 언제나 몸에 지녀도 좋은, 몇 개의 문장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이었다.

예상 못한 인연으로 루이즈 글릭이 내게 온 것처럼 에바 슈트리트마터도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로 나를 찾아왔다. 잘 몰랐던 시인이다. 1930년 동독에서 태어난 이 여성 시인의 시 ‘전설’을 읽었다.

“나무 속으로 들어온,/ 오래전 지나간 삶을 노래한다네/ 기록될 수 없는 흔들거림과 함께/ 오늘까지 울려오네.”

오래된 집이 헐린 뒤 그 집의 뼈대였던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 떠났거나 죽었거나 그래서 잊힌 사람들, 그들이 남긴 생을 노래하는 바이올린. 시인은 그 바이올린이 악보에도 없는 음을 내며 오늘까지 울린다고 표현했다. 모든 생애, 우리가 거쳐온 시공간에서 울리는 소리들은 전설이 된다.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고 우리의 존재와 가치를 찬미하는 동안에는 전설이 되는 것이다.

두 시인의 시를 이어 읽으며 우리가 살며 겪는 고통과 아픔이 어떻게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지 새삼 알았다.

허 시인의 책 제목을 따온 시는 김수영의 ‘사랑’이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1961년에 씌어진 시를 2009년에 허 시인이 감상을 달고 2020년 10월에 내가 다시 읽는다.

모든 것이 변해도 시는 이어 내려오며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변치 않는 사랑을 가르친 너의 얼굴이 불안하다는 것, 사랑을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이유다. 루이즈 글릭, 에바 슈트리트마터, 허수경, 세 시인의 목소리가 어떻게 시로부터 사랑을 배우고 힘을 얻는지 일깨웠다. 무심히 넣어둔 시가 호주머니 속에서 잡히는 그런 가을을 보내고 싶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