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1990년대를 찾는 사람들

국민일보

[가리사니] 1990년대를 찾는 사람들

양민철 정치부 기자

입력 2020-10-19 04:02

‘대한민국의 최전성기’. 1990년대 사회 풍경을 담은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 한 토막이다. 댓글 대다수는 찬양 일색이었다. ‘국민 절반 이상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던, 몸은 불편해도 마음 편한 시절’이었다는 회상이 넘쳐났다. 한 네티즌은 “풍요로움과 여유가 넘치던 시대”라고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 한국이 가장 잘 먹고 잘 살던 시절이란 댓글은 뼈아팠다. 그 밑엔 이런 문구도 있었다. “전 재산 털어 삼성전자 주식과 강남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

2020년 한국 사회는 90년대에 대한 그리움에 푹 빠져 있는 듯하다. 당시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보내며 2020년이 와도 ‘우주의 원더키디’가 외계인과 사투를 벌일 거라고 상상하진 않았다. 대신 전자기기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삼시세끼는 알약 세 개쯤으로 해결할 줄 알았다. 주말에 집에 틀어박혀 90년대 가요 프로그램을 24시간 틀어주는 유튜브 ‘온라인 탑골공원’에 빠져 지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90년 2월 서울 압구정동 한양아파트와 중계동 경남아파트 27평 가격이 1000만~1500만원 차이에 불과했다는 것에 놀라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90년대라고 마냥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은 그때가 더 많았다. 백화점과 한강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미화된 기억 속의 90년대는 희망차고 풍요로운 시절로 박제된 것 같다. 외환위기 직후인 98년도(-5.5%)를 제외하고 한 번도 6% 밑으로 내려가본 적 없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외동이 늘던 시기였음에도 10%를 넘나든 인구성장률 등이 그 근거로 불려나온다. 일자리가 넘쳐나 학과 사무실마다 합격이 보장된 입사지원서가 널려 있었다는 ‘라떼는’(나 때는)식 묘사를 들으면 70, 80년대를 춥고 배고픈 시기로 추억하는 담론과의 온도차마저 느껴진다. 마냥 그리운 시절이 아니라 확실히 좋았던 시대라는 것이다.

90년대를 경험한 ‘라떼들’은 그 시기를 경제적 관점에서, 인생 경로가 나뉜 분기점으로 회상한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목도하며 ‘한강의 기적’이 양극화·저성장·고용불안으로 바뀌는 걸 체감한 탓이다. 일본의 중장년층이 버블경제를 회상하는 것과 닮은꼴이다.

MZ세대(밀레니얼세대+1995년 이후 출생자)들의 90년대 레트로 열풍도 뒷맛이 개운하지 않긴 매한가지다. 한 직장에 평생 다니며 연 10% 은행 이자로 저축해 집 사는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거란 절망감이 묻어나서다. “한 번쯤 저 시대에 살아보고 싶다”는 이들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레트로토피아’에서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울수록 사람들은 자궁으로 회귀하려 한다”고 진단했다. 반복된 좌절로 앞날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 사람들은 미화된 과거 속에 머무르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현재를 견뎌낼 인내심은 향후 다가올 미래가 더 좋고 희망적일 거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90년대 열풍은 어쩌면 불안정한 시대에서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던 사람들이 찾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단면일지 모른다.

유행이 돌고 돌듯 90년대에 대한 향수도 세대가 변하면 지나갈 것이다. 그 시절 한국 사회의 허리를 담당했던 30, 40대는 이제 60, 70대가 됐다. 당시 10, 20대들은 경제 현장의 중심에서 뛰고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인구 감소와 연금 고갈 등 선진국병에 직면한 일본의 레트로 담론은 버블경제 시절에 멈춰선 지 오래다. 아무도 그 이후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30년 뒤 한국 사회는 2020년을 어떻게 추억할까. 동경의 대상까진 아니더라도, 기억에서조차 미화되지 못한 채 코로나19에 허덕이던 시절로만 남을까 두려워진다.

양민철 정치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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