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기본소득이라는 거대한 실험

국민일보

[경제시평] 기본소득이라는 거대한 실험

신자은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입력 2020-10-20 04:03

케냐나 핀란드 같은 먼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경기도에 이어 서울 서초구도 기본소득 실험에 뛰어들었다. 기본소득당이 21대 국회에 입성했고 국민의힘은 기본소득을 정강·정책 1호에 담았다. 기본소득의 선두주자인 경기도는 농촌기본소득 실험에 착수했다. 아직은 생소하고 실험적 접근에 머물러 있을지언정, 바야흐로 기본소득 전성시대다.

기본소득은 그 철학적 뿌리와 역사가 결코 가볍지 않다. 공유부(common wealth)에 기초하는 사회적 기본권으로서 모든 구성원이 무조건 배당받는 현금급여가 기본소득이다. 기독교 전통에 근거를 두고, 사회정의와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지난 몇 세기 동안 사상적, 학문적 논의와 경험이 축적된 데다 정치적으로도 매혹적이고 디지털 시대에 기본소득의 행정적 편리성과 간편함은 기존의 복지제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개인의 예산제약을 완화해주고 아무런 조건과 의무도 부여되지 않으니 소비는 물론, 자기계발, 여가 활용, 삶의 만족도, 자존감 등 측정할 수 있는 모든 지표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이렇게 좋은 기본소득을 왜 지금까지 전면적으로 도입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지금 기본소득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는 재원 문제다. 국내총생산(GDP) 10%(연 189조)를 투입하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월 3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 2020년 보건복지고용 부문 정부 예산(180조5000억)을 고스란히 쏟아붓거나 소득세, 법인세, 상속증여세, 종합부동산세(164조5000억)를 2배로 늘리면 가능하다. 기존의 복지급여를 통폐합하고 증세를 일부 시도하더라도 탄소세, 데이터세, 로봇세같이 아직 사유화되지 않은 새로운 공유부를 신규 세원으로 발굴하지 않고는 의미 있는 수준의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할 재원확보는 어렵다. 경기도의 기본소득이나 국민의힘의 기본소득 안이 진정한 보편성과 지속성을 담지 못하는 건 결국 재원 때문이다. 사각지대 문제나 낙인효과 해소, 행정비용 절감 등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이 실험이 아닌 제도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철학적 근거부터 세제개편까지 풀어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

둘째는 일자리 문제다. 기본소득에 대한 최근의 반향은 세계화와 4차산업혁명 과정에서 야기된 일자리 양극화, 인간노동의 주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근면·성실한 노동이 미덕이라 배웠고, 근로는 헌법상 모든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생산가능인구에 대한 복지급여가 상실된 근로소득에 대한 보완재로서 설계된 것은 일자리로의 복귀, 복지탈출을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소득은 일로부터의 자발적 자유와 비자발적 분리를 구분 없이 허용하고 노동에 대한 어떠한 지향점도 부여하지 않는다. 기술진보로 인구의 10%만 일해도 충분한 사회에서 잉여 노동자가 된 나머지 90%의 무임승차를 비난하는 게 온당하냐는 기본소득 주창자의 글에서 인간노동이 최소화된 기술주도 미래사회를 향한 실리콘밸리의 세계관이 엿보인다.

기본소득이 노동의 굴레, 일자리 창출의 무거운 짐에서 만인을 자유롭게 해줄 묘안인지, 아니면 기술진보와 인간노동의 소외라는 거대한 흐름과의 타협점이 될 것인지. 기술 진보가 결국은 일자리의 순증을 가져왔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대어 당장은 암울해 보이는 인간노동의 운명에 돌파구를 찾기 위한 전 지구적 노력에 기본소득의 의미는 무엇인지. 기본소득이라는 거대한 실험 앞에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보다 진솔하고 폭넓은 고민과 열린 논의가 절실하다.

신자은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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