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사이비역사

국민일보

[한마당] 사이비역사

천지우 논설위원

입력 2020-10-20 04:05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 훈족이 4세기 후반 유럽에 들어가서 거대한 제국을 세워 유럽 민족 대이동을 일으켰다”는 원로 사회학자의 주장이 최근 한 신문에 실렸다. 역사책에서 본 적 없는 이야기다. 여러 백과사전에 따르면 중앙아시아 스텝지대에 거주하던 훈족이 유럽으로 이동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유발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맞는다. 하지만 훈족은 투르크계 유목기마민족이라고 사전에 기술돼 있다. 훈족이 고조선의 후예라고 주장한 학자는 훈족과 흉노족을 같은 종족으로 봤다. ‘훈족=흉노=고조선 후예’라는 것이다. 훈족이 흉노의 일부라는 설에는 역사학계에 이론(異論)이 있다고 한다. 또 몽골고원에서 활약하던 흉노가 고조선의 후예라는 것은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이 학자는 훈족의 몇몇 호칭이 고조선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으나 주장을 납득시키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 한민족이 머나먼 옛날 중국의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를 장악(고조선)했을 뿐 아니라 몽골고원과 중앙아시아 일대도 지배(흉노)하다 유럽에까지 진출(훈족)했다는 얘기가 된다. 듣기만 해도 흐뭇해지지만 이런 얘기일수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광대한 고대 영토에 집착하는 것은 ‘사이비(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른)역사학’의 특징이다. 역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해석이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을 때 사이비·유사역사, 슈도(pseudo·가짜) 히스토리로 규정된다. 학계에서 조작된 책으로 결론내린 ‘환단고기’에 기반한 주장들이 대표적인 사이비역사다. 사이비역사는 민족주의 성향 때문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기경량 가톨릭대 교수는 ‘사이비역사학과 역사파시즘’이라는 글에서 “사이비역사학자들은 학계의 주류를 친일파로 매도하고 그 대척점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전략을 취하기 때문에 친일파 청산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쉽다”고 지적했다.

천지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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