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ILO 협약 비준, 노조를 위한 변호

국민일보

[여의도포럼] ILO 협약 비준, 노조를 위한 변호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입력 2020-10-22 04:03

노동조합에 대한 따가운 시선은 노조가 자초한 것이긴 하지만 이들의 성장 지체가 꼭 그들만의 책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고 정부의 무능도 한몫했다. 지금의 노조와 노사관계에 대한 평가는 따지고보면 역대 정부의 노사정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기업의 경우 나쁜 노사관계는 어느 한쪽 책임이 아니라 대부분 쌍방 과실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노사관계가 나쁘다면 정부의 책임도 따져봐야 한다.

특히 노조의 단결권을 다루는 역대 정부의 태도는 꽤 문제적이었다. 하나의 가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가 노동기본권 문제를 원칙에 맞게 좀 더 빨리 적극적으로 해결했다면 노조의 성숙과 노사관계 합리화를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가장 친노동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문재인정부도 이 문제에 관한 한 과거를 답습했다. 정부·여당이 2020년 정기국회 처리를 다짐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과 노동조합법 개정안의 핵심 쟁점은 실업자와 해고자의 노조 가입 허용 등 단결권 확대에 관한 것이다. 이는 전교조의 노조 자격을 다투는 문제라서 유난히 정치화됐지만 문제의 근원을 따져보면 노동기본권 보장의 문제다.

당초 전교조 합법화와 실업자의 초기업단위 노조 가입은 1998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勞社政) 대타협에서 합의됐던 문제다. 정리해고에 노동계가 합의하는 조건으로 정부가 준 선물이 기껏 노조의 단결권 보장이었다. 그런데도 정리해고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은 대타협이 끝나자마자 즉시 실행됐지만 전교조와 해고자 관련 노동조합법 개정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1년이 다 되도록 변화가 없자 민주노총은 1999년 초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후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1999년 전교조의 합법화는 이루어졌지만 실업자의 조합원 자격 문제는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2004년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대법원 판례로 이 문제는 해결됐지만 정부가 1998년의 합의를 안 지켰다는 역사적 사실은 변함이 없다.

박근혜정부는 다분히 정치적 동기에서 2013년 교원노조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전교조의 법적 지위를 빼앗아 버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이를 원상복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그 결실이 지난 7월 국회에 제출된 노동조합법 개정안이다.

그렇다고 문재인정부가 이 문제를 원칙에 따라 능동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2018년 7월부터 1년가량 노조의 단결권 보장을 노동계에 대한 선물로 보고 노동조합법 개정안에 대한 노사 타협을 시도했던 것이 그 증거다. ILO 협약 비준과 노동조합법 개정을 정부 스스로 결단하지 않고 한국경영자총협회의 동의를 구하려 했던 꼴이다.

재계는 예전에 그랬듯 파업 시 대체근로를 대가로 요구했고 노사는 또 반목과 갈등의 쳇바퀴를 돌았다. 지난 7월 정부가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며 덧붙인 설명 또한 군색하기 짝이 없다. ILO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압력 또는 유럽연합(EU) 차원의 통상 분쟁을 피하기 위해 법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식이다.

가설이지만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개정한 노동조합법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거부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정부가 1998년 사회적 합의를 지켰다면, 박근혜정부가 2013년 전교조를 그대로 두었다면 그리고 문재인정부가 좀 더 일찍 노동조합법 개정을 독자 추진했다면 노조의 성숙과 노사관계의 합리화가 조금은 빨라졌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난 30년간 노동계는 노동기본권을 획득한다는 명분으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투쟁했고 많은 노조 간부들이 교도소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은 ILO나 OECD, EU 등 국제사회에 나가 한국 정부가 노조를 탄압한다며 끊임없이 비난하고 압력 행사를 촉구하고 다녔다.

앞으로 좀 나아질까? 그러나 선도국가의 국가비전 격인 한국판 뉴딜 어디에도 노사관계 합리화를 위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판 뉴딜이 실현되려면 수많은 갈등의 지뢰밭을 건너야 하는데도 말이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