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의학 칼럼] 관계성을 깊게 만드는 힘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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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의학 칼럼] 관계성을 깊게 만드는 힘 ‘공감’

입력 2020-10-2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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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장 15절의 말씀이다. 이를 통해 관계성을 깊게 만드는 건 공감의 힘에 달렸다는 내용을 묵상해보자.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은혜와 긍휼 사이에 무엇이 우선일까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긍휼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릴 긍휼히 보셨으니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셨을까. 긍휼이란 불쌍하고 측은하게 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긍휼은 공감하는 마음과도 같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1위라고 한다. 이혼의 사유로는 성격 차이가 압도적이다. 성격 차이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최근 아동 성폭력, 연쇄 살인 같은 강력범죄도 늘고 있다. 사이코패스가 많아지는 것도 강력범죄 증가의 이유로 꼽힌다. 사이코패스에게 공감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날 적그리스도가 등장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들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다고 기록돼 있다. 성경은 적그리스도를 짐승이라 칭한다. 공감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기준인 셈이다.

지능으로만 따지면 원숭이나 사람이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원숭이는 문명을 만들지 못한다. 반면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 냈다. 인간은 원숭이가 갖지 못한 세포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게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이들은 그걸 ‘거울 신경 세포’라고 명명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만 해도 상대의 생각과 행동,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걸 알아차리는 신경 세포가 있더라는 것이다. 공감 능력을 말한다. 인간과 원숭이를 구분 짓는 건 지능이 아니라 공감 능력이다.

관계성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결국 공감 능력이다. 엘리야가 우울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다뤘던 방식도 공감에서 출발했다. 죽음이 무서워 도망간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메시지를 던졌다. 선지자로서 비겁하고 나약하다고 탓하지 않으셨다. 부끄럽지 않냐고 비난하지도 않으셨다. 대신 그의 형편을 공감하며 위로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렇게 위로하셨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5~8)

예수님은 공감의 달인이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릴 능력이 있었지만 먼저 우셨다.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울고 있으니 함께 울며 공감해 주신 것이었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습만으로 계신다면 과연 우리의 형편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을까.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어떤 고통도 없다. 상처 없는 하나님이 인간과 공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다.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모든 고난과 핍박을 다 받으셨다. 그분은 땀과 피, 눈물도 흘리셨다. 우리처럼 굶주리셨고, 손찌검도 당하시며 온갖 모욕도 다 받아내셨다. 끝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게 예수 그리스도였다.

관계성을 만들어 내는 길은 공감에 달렸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 기쁨을 함께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도 없다. 함께 울고 함께 웃을 때 닫혔던 관계의 문이 열린다. 오늘도 마음을 활짝 열고 여러분 주위로 다가오는 이들의 형편을 살피며 공감하는 삶을 살길 권한다.

이창우 박사 (선한목자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