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목요일은 채식요일

국민일보

[혜윰노트] 목요일은 채식요일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입력 2020-10-23 04:02

오랜 세월 육류를 좋아했다. 어릴 땐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투정을 부리는 식탁의 불효자였다. 인간은 본래 잡식동물이라지만 나는 육식동물인 것 같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조류부터 네발짐승까지, 가공육부터 핏물 밴 살코기까지 가리지 않고 즐겨왔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곁에 채식주의자가 늘기 시작했다. 지인들의 채식 선언을 마주한 솔직한 첫 마음은 ‘이 좋은 고기를 왜?’였다. 의도도 뜻 깊고 의지도 갸륵했으나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할 가치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채식’이란 혀끝의 즐거움보다 더 상위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였다. 채식을 선언한 벗 중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심지어 내가 머쓱할까봐 본인의 건강 때문이라며 웃었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거기에 다다르지 못하는 자신을 민망한 눈으로 돌아보곤 했다. 수런거리는 상념들 끝에 돋아난 마지막 생각은 ‘이제 이 친구랑 만나면 뭘 먹지?’ 하는 것이었다.

보드라운 고기에 섞인 날카로운 뼛조각처럼, 마음을 소란하게 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가 한두 달 키우고 잡아먹는 닭이 원래는 얼마나 오래 사는지 알게 됐다. 우리가 틀에 가두고 살찌우는 돼지가 실은 얼마나 영리하고 청결한 동물인지 배웠다. 잉태되는 순간부터 고기로 취급되는 생명들. 그런 정보를 접할 때마다 나는 가책을 느꼈지만, 거리낌을 느낄 정도로는 양심이 살아 있는 자신에게 안심하며 기왕의 섭생으로 돌아갔다. 지갑에 여유가 있을 때 ‘동물복지’ 라벨이 붙은 식재료를 사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여름이었다. 자비 없는 빗줄기에 많은 강이 범람했다. 뉴스를 살피던 나는 차도를 달리는 황소 떼의 영상을 봤다. 진기한 풍경이라 누군가 찍어 올린 모양이었다. 홍수가 턱끝까지 치받자 소들은 요행히 축사를 탈출한 듯했다. 그들은 본능을 따라 더 높은 지대로 도망치고 있었다. 뒤이어 그 소들이 전남 구례의 한 절에서 발견됐다는 기사를 봤다. 반도가 물에 잠겨 전 국민의 마음에 흙탕물이 감돌던 시기, 대웅전 앞에서 햇살을 즐기는 소들은 희망의 사인 같았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인에게 돌아간 소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또 이런 기사를 보았다. 장마철 폐사하는 가축이 매년 수십만 마리라는.

살아 보겠다고 도망친 생명들이 고기로 회수됐다. 또 어떤 생명들은, 감히 규모가 짐작도 안 되는 수십만 개의 불꽃들은 축사에서 고개를 치켜들며 버티다 까무룩 꺼져버렸을 것이다. 그때 나는 육식에 대해 살갗에 파고드는 회의를 느꼈다. 어쩌면 유리잔에 남실대던 가책이 수위를 넘긴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드라마틱하게 나의 비건 선언쯤은 나와야 할 것 같지만, 단박에 거기까진 이르진 못했다. 나는 일종의 비건 인턴 선언을 했다. 일주일에 하루를 채식의 날로 정한 것이다. 이런 목표를 듣고 누군가 ‘그냥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고기를 안 먹지 않나?’라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선언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우연찮게도 다른 날도 육식을 안 하면 그만큼 더 좋은 것이고, 붙박이로 육식을 않는 날이 있는 것은 다짐을 되새긴다는 면에서도 의미가 있을 터였다. 요일을 정하는 데에도 고민이 있었다. 아무래도 약속이 많은 주말은 피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누군가를 만나 자동차 십부제도 아니고 ‘오늘 제가 채식하는 요일이라…’ 하고 설명하기도 머쓱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의 이런 선언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용기를 내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행동의 한 부분이 아닐까?

해서 나는 글자에서 나무내음이 감도는 목요일을 나의 채식요일로 정했다. 이렇게 하다 조금 익숙해지면 하루 세 끼 중 한 끼는 비건식을 하는 쪽으로 범위를 넓혀보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목요일이고 나는 곧 요리를 할 것이다. 거기에 남의 살은 들어 있지 않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