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정책이 만든 전세난, 싸우게 된 사람들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정책이 만든 전세난, 싸우게 된 사람들

입력 2020-10-23 04:04

전세 수급의 극단적 불균형 속 내용증명 주고받는 이들 급증
전화 한 통으로 조율되던 일이 변호사까지 찾는 싸움거리로
부동산정책이 몰고 온 대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부동산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엊그제 이런 글이 올라왔다. “저는 임대인이자 임차인입니다. 지금 사는 집 주인이 계약 만료 때 들어오겠다고 하십니다. 아이 학교 때문에 이 동네에서 집을 구하려고 다른 동네에 저희가 세 준 집은 팔려 했습니다. 임차인께 사정을 말하고 매매 협조를 부탁했지만 거절하고 계약갱신을 청구하시기에 그럼 저희가 실거주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네 전세를 낀 상태로 팔라 하십니다. 그건 어렵겠다고 실거주 의사를 다시 밝혔는데, 이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고민 끝에 문자를 보냈습니다. 입주 가능 매물로 팔 수 있게 협조해주면 이사비로 몇 백을 드리겠다, 안 된다면 저희가 실거주하는 방법밖에 없다고요. 역시 대답이 없습니다. 더 이상은 협상할 여지가 없어서 무조건 실거주할 예정입니다. 임차인이 쉽게 나갈 것 같지 않아 내용증명을 보내려 합니다. 그런데 처음이라서… 내용증명은 어떻게 쓰는 건가요?”

이 사연에는 지금 전세 시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이 집약돼 있다. ①‘1주택 실거주’를 재촉하는 정책에 따라 누군가 실거주를 택하면 이렇게 전셋집을 비워야 하는 임차인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②그 연쇄사슬의 고리마다 계약갱신청구권과 실거주권이 충돌하고 있다. 이 글의 상황은 실거주권이 갱신권보다 우위에 있지만, 홍남기 부총리의 의왕 집에선 갱신권이 매수자의 실거주권을 눌렀다. ③계약갱신청구권은 매매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세 낀 매물은 급매라도 쉽게 팔리지 않고 입주 매물과 가격차가 현저히 벌어져서 저 임차인의 요구를 들어주기 어렵게 됐다. ④주변 전셋값이 워낙 폭등하니 집을 비워줘야 하는 임차인이 연락을 끊고 버티는 경우가 많다. “세입자가 잠수 탔어요” 하며 대응책을 묻는 글이 줄기차게 올라온다. ⑤그래서 임차인을 내보낼 때 돈을 주는 일이 보편화되고 있다. 명칭은 아직 통일되지 않아서 이사비 위로금 퇴거금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액수가 갈수록 커져 수천만원씩 하기도 한다.

가장 안타까운 대목은 이것인데, ⑥내용증명과 명도소송이 일상화됐다. 내용증명은 법적 분쟁에 대비해 계약관계를 명확히 공증하는 절차다. 상대방을 믿지 못해서 미리 못 박아두고 약속을 지키도록 압박하는 행위. 이 글쓴이처럼 생전 처음 내용증명을 주고받는 이들이 급증했다. 인터넷에는 그런 이들을 위한 ‘내용증명 사례집’까지 등장했다. 전에는 “집을 비워주셔야겠다” “한두 달 더 말미를 주면 좋겠다” 하면서 전화 한 통으로 조율되던 일이 이제는 서로 얼굴을 붉히고 험악한 문자를 건네다가 “법대로 하자”며 변호사를 찾아가는 싸움거리가 돼버렸다. 다음과 같은 댓글이 이 글에 붙어 있었다. “임차인과의 대화는 가급적 기록이 남는 문자로 하시고, 통화할 경우 전부 녹음해 근거 남기시고요. 퇴거 불응 시 명도소송 내겠다, 소송비용과 피해 금액을 보증금에서 제하겠다고 내용증명에 써서 보내세요.”

이번 전세 대란은 만들어졌다. 스물세 차례 부동산 정책의 많은 부분이 지금의 사태를 몰고 왔다. 1주택자 양도세 혜택에 2년 실거주 조건, 재건축 조합원의 입주권 취득에 또 2년 실거주 조건을 붙여 임대인이 임차인을 내보내고 직접 들어가게 만들었다. 대폭 올린 보유세는 임대인이 전세를 월세로 돌리게 했다. 다주택과 갭투자는 매매 시장에선 수요지만 전세 시장에선 주된 공급원인데 이를 차단하는 규제를 첩첩이 쌓았다. 계약갱신청구권은 해당하는 임차인을 일제히 기존 전셋집에 머물게 했고, 전월세상한제는 임대인이 갱신권을 피하는 순간 임대료를 왕창 올리게 했다. 분양가상한제로 청약은 더욱 로또가 됐는데, 3기 신도시 등 공급 물량이 완성되려면 5~6년은 걸려서 대기하는 전세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정책이 빚어낸 전세 수요-공급의 극단적 불균형 속에서 사람들은 내용증명을 보내고 통화 내용을 녹음하며 싸움을 벌이게 됐다. 갈등을 조율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부추긴 이 갈등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서울의 신규 입주 물량은 올해까지 예년 수준을 유지했지만 내년부터 이 정부의 재건축 규제 여파가 닥쳐 절반으로 급감한다. 전세 물량은 더 부족해질 테고, 분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다. 홍 부총리는 “이런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는데, 또 대책이 나온다니 벌써 마음이 무겁다.

태원준 편집국 부국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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