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이건희 회장의 불면의 밤

국민일보

[데스크시각] 이건희 회장의 불면의 밤

한장희 산업부장

입력 2020-10-29 04:05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발언을 영상으로 접하고 사실 좀 충격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그동안 숱하게 들었지만 이건희 회장의 열변을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억 속 그의 메시지는 직설적이고 함축적이었지만 말투는 늘 눌변이었기에 더 놀라웠다. 20여년 기자생활을 했지만 이 회장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았다. 2003년 뉴스위크가 아시아판 기사로 이 회장을 다룰 때 ‘은둔의 제왕(The Hermit King)’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것처럼 공개석상에서 그를 접하기는 힘들었다. 6년5개월 투병 끝에 작고한 지난 25일 이후 공개된 과거 영상과 일화들이 그래서 더 새로웠나 보다.

사실 언론사 대부분은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자 이 회장 부고 기사를 미리 준비했다. 일부 매체는 지난 25일 몇 년 전 준비한 기사를 급히 내보내느라 이 회장 나이를 고치지 않은 채 온라인에 전송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본보도 미리 써놓은 부고 기사들이 있었다. 준비된 기사들을 본 첫 느낌은 ‘너무 관념적이지 않나’라는 불안감이었다. ‘가부장적이었던 전통적 기업가 모델을 모험적·혁신적 기업가상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2030세대는 물론 4050세대가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그런데 이 회장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삼성을 둘러싼 각종 수사와 재판 관련 뉴스에만 익숙해 있던 청장년층에게 젊은 시절 이 회장 관련 영상과 일화가 일종의 기폭제가 된 모양이다. 과거 영상 속 ‘열변과 격정의 이건희’가 ‘눌변과 은둔’의 이미지를 깨면서 그의 메시지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정경유착’ ‘무노조 경영’ 등에 대한 비판은 여전하지만 이 회장의 기업가 정신에 대한 재평가 역시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오늘의 삼성을 일군 원동력으로 이 회장의 ‘열정’과 ‘절박함’을 꼽고 싶다. 어린 나이부터 사색과 공상을 즐겼다고 하지만 흥미를 느끼는 무언가를 무섭게 파고드는 성향은 열정을 빼고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특히 신경영 선언을 했던 1993년 직접 위기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4개월에 걸쳐 1800여명의 임직원을 상대로 길게는 하루 16시간 열변을 토했다는 일화는 그의 열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열정은 절박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 회장이 직접 쓴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그는 “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때는 하루 4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결국 변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낳았고, 그 후로도 ‘강박적 위기의식’을 끊임없이 간부들에게 주문하는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 회장의 별세로 국내 4대 그룹은 모두 40, 50대 3·4세 총수 체제로 재편되는 분위기다. 젊은 총수들은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양호한 실적을 거두며 경영 능력을 증명하고 있지만 불안하게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지배구조 개편뿐만 아니라 기업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선제적 기술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 난제도 안고 있다. 세대교체를 계기로 권위적 리더십을 탈피한 소통·실용주의 리더십이 전면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곧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절박함과 열정은 여전히 경영의 핵심 키워드라는 점이다. 세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이 회장처럼 밤을 지새우며 사업 방향을 고민하는 절박함과 열정이 없다면 ‘초일류’는 유지도 탈환도 힘들 것이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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