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트럼프 현상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국민일보

[김명호 칼럼] 트럼프 현상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입력 2020-11-17 04:01
트럼프 찍은 '한심한 사람들' 올해도 7110만…이익 나누고 적대적 공생하는 기성 정치권 갈아 엎으려는 실체 있어

기득권 보호 기능하고 부조리 가득한 현 정치체제가 취약한 민주주의일 수도… 개선 안되면 넥스트 트럼프 출현 가능성 커


“한심한 사람들(Deplorables).”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유세에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을 이렇게 불렀다. 그 한심한 사람들이 올해에도 최소한 7110만명을 넘는다. 이번에도 트럼프를 찍은 이들이다. 재검표 소동이 일어나고 트럼프가 완전히 승복하진 않았지만 조 바이든 당선인의 승리를 뒤집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미국 투개표 시스템이 결과의 정당성을 의심받게 할 정도로 뒤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개표가 몇 주 걸리는 등 가난한 후진국에서나 있을 일들이 일어난다. 선거와 관련한 이런 불신과 비효율, 무능력이 지금까지는 패배자의 승복이라는 선의에 의해 뚜렷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승복이라는 선의는 미국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일종의 가드레일이며, 정치·사회적 규범이다. 그런데 패배한 무리가 음모론을 제기하며 불복한다. 이렇게 규범이 허물어지는 것을 제국이 서서히 붕괴하고 있다는 징후로 해석하는 미국 내 여론지도층이 적지 않다. 이제 미국은 20년 전 민주당 후보 앨 고어가 분열을 우려해 깨끗이 승복하며 “This is America”라고 선언했던 그 나라가 아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심한 사람들이 7110만명이나 된다니. 제국을 망가뜨리고 이류 국가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태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고? 이건 아주 중요한 정치적 현상이고, 왜 그런지 깊이 따져봐야 할 연구 대상이다. 선거야 어차피 편 갈라 죽자사자 싸우는 일이니 포퓰리즘이니 가짜뉴스니 하는 것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2016, 2020선거와 트럼프 재임 4년 동안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를 겪었다. 옥스퍼드 사전이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진실이 중요치 않은’ 또는 ‘비(非)진실적인’ 뜻의 시대에는 진실과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

트럼프는 대중의 믿음이 불러낸 분노와 증오를 한껏 활용했고, 분노와 증오는 믿음을 더욱 공고히 했다. 믿음의 대상은 트럼프주의이며, 분노와 증오의 대상은 워싱턴 정치권(=기득권층)이다. 기저에는 진보나 보수가 서로 공격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생하며 다른 계층의 진입을 가로막고 이익을 나눠 갖는 기득권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절대적 믿음이 있다. 워싱턴 이스태블리시먼트(establishment), 즉 기득 이익에 안주하는 정치권에 대한 반감은 정치적으로는 신보수주의,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본격 출발한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시대 이래 수십년 동안 증가했다. 이들은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 조 바이든 같은 이들이 말은 현란하지만 구체적으로 해 놓은 게 없다는 강한 생각을 하고 있다. 실행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진보 진영이라고도 주장한다. 이를 깨부수지 못한, 깨부술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공화당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기존 정치 엘리트 체제에 확실히 반대하는 미치광이 전략에 7110만명의 동의가 나온 이유다.

이들에게 트럼프는 1970년대 초 영화 ‘더티 해리’의 주인공 형사 칼라한(클린트 이스트우드)과 같은 존재다. 연쇄살인범을 부패한 상관이 석방하자 비합법적 방법으로 사살한 영웅이다. 부패하고 부조리 가득한 기존 정치권을 갈아엎는, 한다면 하는 방식 말이다. 맞든 안 맞든, 진실이든 아니든 솔직하게 까발리면서 원초적 욕망을 자극한다. 당시 평론가들은 반전평화 분위기가 팽배한 시절, 보수주의자들의 무의식이 투영된 영화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우리를 비롯한 전 세계의 합리적 여론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와 덕목을 해친 트럼프를 비난한다. 그리고 이번 선거로 미국의 가치가 회복하리라 전망한다. 그런데 트럼프에게 열광하는 이들은 기득권층이 만들어 놓은 정치적·사회적 규범·규칙이 교활하게도 정치·경제·사회·문화 기득권층의 이익 보호막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게다. 트럼프는 갔지만, 그가 지적했던 걸 깨뜨려야 한다는 의견은 더 강해질 수도 있다. 기막힌 역설이지만, 엘리트들끼리 주고받는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가 그만큼 취약한 것은 아닌가.

그러니 갈등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넥스트 트럼프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건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가 완전히 퇴장할지, 정치권 밖에서 으르렁거리며 힘을 더 키울지 모르지만, 그가 민주주의 체제에 던져준 숙제다.

편집인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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