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기상천외 첫 토종 시트콤… 드라마인가, 코미디인가

국민일보

[드라마는 시대다] 기상천외 첫 토종 시트콤… 드라마인가, 코미디인가

<14> ‘오박사네 사람들’

입력 2020-11-21 04:02
‘오박사네 사람들’은 SBS에서 1993년 방송한 대한민국 최초의 시트콤이다. ‘순풍산부인과’의 전신이 되는 작품으로, 최고 시청률 36.6%를 기록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등장인물이 예명이 아닌 본명을 쓰고, 녹화 현장에 관객을 받는 등 파격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SBS 제공

살을 빼겠다는 아내와 담배를 끊겠다는 남편의 다짐은 무색했다. 깊은 밤, 배고픔에 잠을 잘 수 없었던 아내는 불도 켜지 못한 채 부엌에서 밥과 반찬을 허겁지겁 집어 먹었다. 쩝쩝거리는 소리만으로도 허기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불이 켜지며 남편이 들어왔고 현장을 목격당한 아내는 재빠르게 빼앗아둔 담배를 남편의 입에 물려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환한 웃음을 짓는 남편은 협상이 성사되었다고 좋아했지만 그것도 잠시, 시누이에게 들킨 이들은 부리나케 도망가는데 그들이 향한 곳은 방청석이었다.

스튜디오에서 뛰어나온 잠옷 차림의 부부는 방청객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앉았다. NG인지 아닌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방청객이나 배우나 한번 터진 웃음을 쉽게 멈추게 하진 못했다 치과의사인 오지명 가족의 일상 이야기를 그린 대한민국 최초의 시트콤 SBS ‘오박사네 사람들’(1993)의 시작은 이렇게 기상천외했다. ‘공개 코믹 드라마’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했지만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코미디 같았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가 일반적이었던 드라마 녹화현장에 시청자들을 자리하게 한 것을 생각하면 연극을 보는 듯도 했다.

오박사네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세계

1991년 개국부터 주말 뉴스 앵커로 배우 이혜영을, 경제 프로그램 진행자로 배우 이휘향을 기용하는 등 파격적 기획으로 화제가 되었던 SBS는 드라마도 색다른 시선으로 접근했다. 남들이 하지 않은, 그러나 성공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을 시도해 보자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시트콤이었다. 시트콤이란 단어는 낯설었지만 “코스비가족 만세(미국 NBC 시트콤) 같은 거야.” 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해했다. 그렇게 시작한 ‘오박사네 사람들’은 최고 시청률 36.6%(닐슨 코리아)를 기록했고 한국 드라마 최초의 시트콤이 되었다. 그 성공의 핵심은 ‘익숙함에서 벗어나기’였다.

제작진부터 의외였다. ‘유머1번지’(KBS)를 제작했던 주병대 PD와 장덕균 등 5명의 작가가 신세계 개척의 깃발을 올렸다. 시트콤은 말 그대로 시추에이션 코미디, 그 뿌리를 코미디에 두고 있으니 이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지만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던 사람들이 모여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은 의외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박사네 사람들’에는 코미디언이 한 사람도 출연하지 않았다. 아버지 오지명과 어머니 김수미를 중심으로 큰딸 박지영, 큰 사위 윤승원, 작은딸 김윤정, 오지명 동생 임예진, 간호사 안문숙, 사진관 사장 임현식, 구두닦이 이병철 등 출연진 모두는 배우였고 구두닦이로 출연한 김흥국만 가수였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본인의 이름 그대로 출연하는 것은 흔치 않은 설정이었다.

출연진 중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오지명과 김수미였다. 오지명은 액션 배우로 악역의 이미지가 강했고, 김수미는 ‘오박사네 사람들’이 시작될 때도 ‘전원일기’(MBC)에 출연 중이어서 일용엄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코믹 연기를 위해 망가질 수밖에 없었던 시트콤은 변신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었다.

오지명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식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의 억지는 언제나 실효성 없이 무너졌다. 열 살도 안 된 늦둥이 아들에게조차 놀림을 당할 때가 많으니 이럴 때마다 그는 목에 핏줄이 서도록 소리를 질렀고, 한껏 눈을 부릅떠보기도 했지만 파르르 떨리는 눈에선 시린 눈물만 흘러내렸다. 두 손을 어정쩡하게 올리고 몸을 좌우로 한두 번 흔들며 독특한 기압을 주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김수미는 시누이에 사위까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보기 드문 대가족의 안주인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남편은 알뜰하지 못하다며 심심하면 타박이지만 병원 간호사들 점심까지 일일이 챙겨야 하는 그녀의 가계부는 항상 빠듯했다. 펑퍼짐한 주부와는 거리를 두려고 깔끔한 스웨터를 자주 입었고, 약간의 콧소리가 섞인 말투에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 주부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지만 참다못해 화를 낼 때는 영락없는 일용엄니였다.


‘오박사네 사람들’은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들을 중심으로 일상의 웃음을 만들어냈다. 권위를 앞세운 질서를 무용하게 만들고 숨겨져 있던 허위와 위선이 드러날 때 웃음은 터졌나왔다. 상황은 세밀하게 그려졌고,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재치있는 대사와 과장된 몸놀림은 웃음이 멈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이 정의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반문하지 않아도 되었다. 누구와 친해야 나에게 유리할지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 때문에 괴롭거나 오지 않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웃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조금 격의 없어도, 틀에 맞춘 듯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가족의 일상이란 누구나 그렇게 흐트러진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더 정감이 갔던 오박사네 사람들의 일상은 고단한 하루를 위로받을 수 있는 신나는 휴식이었다. 혹자는 방송에서 걸러져야 했던 표현이나 행동들이 과감히 등장했다며 저질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삶이 매번 고품질일 수는 없지 않은가. ‘오박사네 사람들’이 보여준 직설 화법은 그래서 속 시원하기도 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면 제작 방식도 달랐다. 공개 코미디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드라마든 코미디든 제작현장은 비공개였지만 ‘오박사네 사람들’은 과감히 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방청객들은 계단식 간이 방청석에 앉아 이들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연극배우가 아닌 TV 배우들에게 공개방송은 부담스러웠지만 새로운 도전은 배우나 방청객이나 모두 흥미로운 탐험이었다. 출연진조차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때가 많았던 ‘오박사네 사람들’은 현장의 웃음과 박수 소리를 그대로 방송 효과음으로 사용하며 시트콤의 맛을 살려냈다.

시트콤의 부활을 기다리며

시트콤을 제작한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아무리 신생 방송사의 차별화 전략이라곤 하지만 드라마인지 코미디인지 정체가 모호했던 시트콤의 성공을 점치긴 쉽지 않았다. 전체를 관통하기보다는 매회 이야기가 종결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 시트콤은 풍자와 패러디, 과장과 순발력을 통해 드라마적인 따뜻한 감동과 코미디스러운 밀도 높은 웃음을 만들어내야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트콤은 단어가 낯설었지 그 형식이 낯설지는 않았다. 1970년대 ‘왈가닥 루시’나 ‘아내는 요술쟁이’를 비롯해서 ‘코스비 가족만세’까지 모두 시트콤이었다. 코미디 외화로 통칭되었지만 이미 시청자들은 시트콤을 즐겨 보았기에 그 익숙한 낯섦을 믿고 무모한 모험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제작비가 적다는 것도 한몫했다. 일반 드라마 제작비의 50% 내외면 제작할 수 있었던 시트콤은 상대적으로 실패의 충격도 적었다. 스튜디오에서 제작되다 보니 영상의 디테일보다는 개성 있는 캐릭터와 독특한 상황 설정이 웃음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제작비 규모가 작았던 덕분에 시트콤은 외환위기 때는 방송사 드라마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한몫을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런 재미는 없었다. 이것은 드라마인가 코미디인가’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나게 하는 ‘오박사네 사람들’이 등장한 것도 벌써 28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한국의 시트콤은 ‘LA 아리랑’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이상 SBS), ‘남자셋 여자셋’ ‘논스톱’ ‘세친구’ ‘거침없이 하이킥’ ‘안녕 프란체스카’ ‘크크섬의 비밀’(이상 MBC), ‘달려라 울엄마’ ‘올드미스 다이어리’(이상 KBS), ‘청담동 살아요’(JTBC)등으로 이어오면서 성공적으로 왕국을 구축해 왔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소재와 구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시트콤은 그 빛을 잃은 지 오래인 듯하다. 캐릭터 열전을 펼치고 있는 버라이어티,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코믹 드라마에 내주었던 자리를 언제쯤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시트콤의 부활이 기다려진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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