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흙탕물이 지나가는 길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흙탕물이 지나가는 길

배승민 의사·교수

입력 2020-11-20 04:02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심란한 상황이 됐다. 시작은 참 사소한 일이었는데, 오래 묵은 작은 문제들이 잘못 해석돼 어느새 눈덩이처럼 부풀었다.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하고 그간의 노력이 다 허사인 것 같은 속상함 때문에, 통화 이후 열린 중요한 회의시간 내내 회의에 집중하기가 영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상황이 나라는 개울물 위로 한 줄기 흙탕물이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깊은 산 속 개울일지라도 때론 지나가던 산짐승의 움직임에, 때론 소낙비에 떨어진 암석 조각에 의해서건 흙탕물은 예측 없이 일어난다. 바닥이 깊은 묵직한 물이라면 웬만한 변화에도 그다지 영향을 안 받겠지만, 나 같은 얕은 개울은 개구리의 뜀박질에 흔들린 돌멩이에도 온갖 흙탕물이 다 일어 시야가 흐려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가만 보니 통화가 끝난 후에도 이 흙탕물이 쉬이 가라앉지 않고 계속됐던 것은, 훅 하고 어지러워진 시야에 당황해 물을 가만두지 못하고 자꾸 허공을 휘저었던 내 손길 탓이었다. 그대로 뒀다면 그 물길은 이미 한참 전에 저 아래로 굽이굽이 흘러갔을 텐데 흙탕물의 진원지를 파보겠다고, 어떻게든 내 노력으로 잠재워보겠다고 헛된 손짓으로 허우적거린 통에 자꾸 흙먼지가 올라왔던 것이다. 흙탕물이 지나가는 길을 내 헛된 노력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비록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불구덩이에서 내려와 조금씩 식기 시작했다.

어지럽던 마음이 식어가는 동안 곰곰이 내 모습을 돌이켜보니, 헛된 분탕질에 낭비한 시간이 조금 안타까웠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그 물길의 유속이 빨라지길, 또는 그 흙먼지에 다른 탈은 안 나길 살펴보는 게 보다 현명했으리라. 다음에 마주할 흙탕물에는 나도 모르게 휘젓는 손을 조금은 빨리 멈춰보려고 노력해봐야겠다. 얕은 개울물일지언정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는 법이니까.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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